정부는 12.12(월) 제48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무역 1조불 달성에 특별히 공헌한 특별유공자 31인을 포상할 예정이다
 
특별유공인 31인은 경제개발 50년 동안 한국 수출의 성장을 위해 진력한 인물들로 이들 중 19인이 걸어온 길을 정리하여 배포하였다.
 
주요 공적, 감동적인 일화, 직무 수행 중 잊지 못할 에피소드 등

<무역 1조불 특별유공자 면면>

순서

이름

근무처 및 직위

주요 공적

1

故 William J. Duncan

前 UASC 기술수석책임

한국에 조선기술 전수

2

백 덕 현

前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부사장

자체기술로 제철소 설계

3

정 호 균

前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고문

AMOLED 제품 양산

4

故 아리가 토시히코

前 신일본제철 감사역

제철소 건설 및 기술 협력

5

고 재 규

(주)소닉스 상무이사

금형 기술의 명장

6

김 창 현

삼성전기(주) 전무

D램 메모리 개발 선도

7

전 영 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소장

초기 차체 디자인 및 자동차 연구

8

이 상 규

주식회사 카프로 대표이사

석유화학 수출 증진 기여

9

조르제토 주지아로

이탈디자인 주지아로 대표

한국 고유모델 디자인 참여

10

이 영 규

(주)웰크론 대표이사

산업용 극세사 제품 개발

11

최 영 식

(주)SK에너지 과장

석유제품 선적 전문가

12

김 현 수

(주)대성엘텍 이사

차량용 미디어제품 개발 및 수출

13

유 희 준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시스템반도체(RAMP) 개발

14

이 철 우

삼성물산(주) 부사장

플랜트 수출의 전문가

15

천 경 준

(주)씨젠 회장

삼성휴대폰 애니콜 신화의 시초

16

황 성 혁

(주)황화상사 대표

400여척의 국산 선박 해외 판매

17

김 종 수

현대자동차(주) 기장

자동차 도장공정 연구

18

원 용 희

기아자동차(주) 기사

자동차 선적 전문가

19

전 병 직

(주)코리아나 대표이사

창의적 가발 디자인 및 수출

주요 특별 유공자 스토리

1. 前 UASC 기술수석책임 故 William John Duncan(금탑산업훈장)

한국 조선산업의 태동기였던 70년대, 이름뿐이던 현대중공업을 믿어주고 23천급 다목적선 15척을 발주한 선주기업은 UASC(United Arab Shipping Company)라는 중동의 조선 기업이었다.

UASC의 기술책임을 맡고 있던 영국 출신의 존 던컨이 발주된 선박에 대한 기술 지도를 총괄하게 되었다.

첫 방문은 요란했다. 까다로운 성격이라는 기존의 평판과는 달리 그는 한국 현지 임직원들과 술자리를 같이하는 등 격의 없이 어울리며 한국 조선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끈끈한 정을 형성해나갔다.

스코틀랜드인 존 던컨은 격식 없는 자리에서는 유머가 넘치는 성격이었으나 건조 현장에서는 180도 달라져 도면 설계 및 건조 지도를 깐깐하게 수행하였다.

고집스러운 성격 때문에 현장에서는 직원들과 소리 높여 싸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외국인들과 함께하는 모임에서는 한국인 예찬자로 돌변하여 한국 조선산업의 발전가능성을 외국 선주기업들에게 전파하는데 힘썼다.

‘78년 1월, UASC의 컨테이너선 4척을 수주하는 데에는 일본기업을 지지하는 사장의 방침을 어기면서까지 현대중공업을 물밑에서 지원한 그의 공헌이 지대했다.

경쟁 기업의 입찰 금액까지 알아내서 페이퍼 냅킨에 적어주는 등 그의 적극적인 정보 제공을 바탕으로 현대중공업은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던 UASC 이사회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하였다.

한국 조선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은인‘이었지만 한국 기업으로부터 어떠한 금전적 보상도 받지 않았다. ’80년 위암으로 작고하기 전까지 한국인들과 끝까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존 던컨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희생은 세계 1위의 한국 조선 산업을 키워낸 귀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고인의 유가족을 찾기 위한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영국 경찰청 인사들과 접촉하여 협조문을 발송했지만 주민등록제도를 운영하지 않고 엄격하게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있는 영국의 현실상 수소문이 어려웠다.

UASC 본사에서는 직원 데이터베이스의 소실로 유가족을 찾는 것이 어렵다고 밝혀왔다. 지역 신문에 기사 및 광고까지 게재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고인의 子 Andrew Duncan에게 접촉 성공, 무역의 날 행사에서 대리 수상을 하게 되었다.



 前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부사장 백덕현(금탑산업훈장)


1967년, 산업화의 핵심 원료인 철강의 국산화를 꿈꾸며 시작한 포항제철이었지만 첫 제철소(포항1기)는 일본의 기본 기술에 의지하여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백덕현 전 부사장은 이러한 현실에 개탄하면서 포항2기 때부터 설비계획기술의 독립을 추진해왔다.

70년대 초반 포항2기 건설 당시는 오일쇼크가 부른 원자재 가격 상승, 한일관계 악화와 일본측의 기술협조 불투명,

그리고 엔화절상에 따른 설비도입단가 상승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친 시기였다. 그러나 백 부사장은 ‘기본기술계획’과 ‘상세구매사양’을 작성하는 작업은 제철소의 DNA를 설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지고 일본의 기술과 노하우를 철저히 익혀 나갔다.

그 결과 포항4기부터는 일본기술단(JG)의 검토과정이 사라지고, 광양2기부터는 순수 우리 기술만으로 완벽한 제철소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철강뿐만 아니라 제철소의 DNA로 불리는 설비계획기술까지 국산화해내었을 때 한국 철강은 비로소 일본 기업을 따돌리는 경쟁력을 지닐 수 있게 된 것이다.

백 전 부사장은 이뿐만 아니라 조강 생산능력 확충․자동차용 강판 개발 등에 앞장섰고 포항산업과학기술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면서 제철현장에서 필요한 핵심기술 개발에 힘썼다.

부단한 설비신예화와 기술발전에 총력을 기울이고 이에 상당하는 공장관리 쇄신활동 또한 병행해 나갔다. 산업 근대화의 산증인이자 핵심 역군인 그는 산업계에서는 이례적으로 대한금속학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또한 포항산업과학기술연구소에 2대 소장으로 재직 시 포스코 고유의 친환경 제철기술인 FINEX공법의 기초가 되는 용융환원제철법에 대한 연구를 주도했으며,

금속학회 회장 및 포항공대 교수활동을 통해 현업에서의 경험과 기술 분야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가발전을 위한 기술의 끊임없는 혁신과 개발의 필요성과 방안을 후학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의욕적으로 펼쳤다.


 前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고문 정호균(은탑산업훈장)

스스로 빛을 내는 디스플레이. 차세대 디스플레이 소재로 각광받고 있는 능동형유기발광다이오드(이하 AMOLED)에 관한 이야기이다.

AMOLED는 자체발광, 초박형, 고화질, 고속응답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가 갖추어야 할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어 이상적인 디스플레이로 각광받고 있다.

한국의 AMOLED 시장 점유율은 ‘11년 2분기 기준 99.3%에 달한다. 세계 시장을 독점한 셈이다. 정호균 전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고문은 삼성SDI 재직 시절 LCD시장이 정체 상태에 진입중인 것을 간파하고 AMOLED연구를 주도하였다.

당시, 일본 등 해외의 많은 기업들이 AMOLED 사업화를 위하여 많은 시도를 하였으나 수명 및 공정상의 문제로 사업화에 실패를 거듭하였다.

정호균 고문은 ’하면 된다‘라는 신념으로 기술개발에 매진하였고 2007년 2.2인치 AMOLED를 양산하는데 성공하였다. 각종 스마트폰 모델에 양산된 AMOLED 디스플레이를 적용하고 해외시장 점유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한국은 AMOLED 관련하여 독보적인 기술적 우위와 시장 선점효과를 누리게 되었고, 삼성은 모바일 디스플레이뿐만 아니라 TV 등 가전제품에도 AMOLED를 적용하여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 이제 AMOLED는 한국의 차세대 미래 먹거리로서 명실공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前 신일본제철 감사역 故 아리가 토시히코(동탑산업훈장)

1967년 야심차게 시동을 건 포항제철이었지만 당시 박태준 사장 이하 임직원들은 제철소는커녕 고로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외국의 선진기술을 전수받는 것이 급선무였을 때, 이웃나라 일본에의 견학 및 연수를 연결해준 것이 아리가 도시히코와 한국의 첫 인연이었다.

이후 한국 정부는 제철소 건설을 위한 컨설팅을 일본에 요청한다. 이 때 누구보다도 한국 철강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인물 역시 아리가였다.

그는 한국의 일관제철소 프로젝트가 타당성이 있음을 일본 정부에 적극적으로 설득하였고, 이로 인해 <제철소 건설의 자금조달에 관한 기본 협정>이 양국정부간에 조인되어 포항제철소 건설은 한․일간 합작 프로젝트로 발족하게 되었다.

1968년 봄 그가 포항제철소 예정지를 돌아보았을 때 첫 느낌은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군” 정도의 느낌이었다. 이후 지형, 지질, 수리, 기상, 해상 등과 관련한 상세한 데이터를 조사해 볼수록 포항제철소를 건설해 보고 싶은 생각이 솟구쳐 올랐다고 전한다.

그는 재팬그룹 단장으로 비록 신일본제철 소속의 일본인이었지만 국제 설비 브로커의 입김에 굴하지 않고 무엇보다 양심적이고 원칙을 중시하는 자세로 1억 달러가 넘는 설비구매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버티는 한 국제 브로커의 입김은 먹힐 수가 없었다.

이를 간파한 국제 브로커는 일본 철강업계를 상대로 공작을 부려 재팬그룹 단장을 교체하려 하자 아리가 단장의 청렴성을 높게 산 박태준 사장이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사장에게 요청해 그를 재팬그룹 단장으로 계속 일하게 하였다.

이런 그의 양심과 헌신 덕분에 1기 설비구매를 둘러싼 각종 압력을 배제하며 효율적인 설비구매 전통을 수립함은 물론 저렴한 공장건설과 성공적 조업의 밑거름을 다질 수 있었다.

그 당시 포항은 목욕탕 하나 변변히 없는 열악한 곳이었지만, 아리가는 포항 1기 건설기간 3년간 포항에 주재하면서 적극적으로 기술협력 업무를 수행하였다. 신일본제철 본사에서 기술 전수를 지나치게 열심히 한다고 아리가를 질책할 정도였다.

그의 헌신적인 도움을 통해 한국 철강 산업이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한․일 간의 우호도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은퇴 이후에는 한일문화협회의 회장직을 맡아 끝까지 한·일 우호증진에 헌신하였다. 2007년 90세의 향년으로 작고하였다.


 (주)소닉스 상무이사 고재규(동탑산업훈장)

금형은 각종 기계의 뼈대와 몸통을 만들어내는 중요 기술이다. 한국 금형산업의 발전에 41년간 매달려온 고재규 상무는 대한민국 최초의 기계분야 금형명장이다.

끊임없는 기능 연마를 통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그는 삼성전기에서 컴퓨터, 캠코더, 카메라 렌즈, 휴대폰 등 주요 제품의 생산성과 품질을 크게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 정년퇴임 이후에도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다시 중소기업 (주)소닉스에 입사하여 사출, 프레스 금형 제작 등을 총괄하면서 세계 각국에 850억원(2010)어치를 수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상공부장관상, 대통령 표창 등 수많은 수상경력을 보유한 그는 오늘도 한국기술교육대학교에서 강사로 활동하며 수많은 후배 명장들을 키워내는데 진력하고 있다.



 삼성전기(주) 전무 김창현(동탑산업훈장)
삼성전자 반도체의 주력상품인 D램 메모리 개발의 선봉장이다. 84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현재 세계시장에서 주력하는 D램 제품의 개발에는 늘 그가 핵심에 있었다. 반도체공학의 국제 표준 심의기구인 JEDEC의 세계 표준 기술 선정에도 큰 기여를 하였으며, ‘11년 미국전기전자공학회 석학회원으로 선정되어 세계적인 D램 기술 전문가로 공인받고 있다.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 소장 전영선(동탑산업훈장)


1967년 쌍용자동차의 전신이었던 “하동환자동차”에서 제작한 버스 20대가 베트남 수출길을 활짝 열었다.

그 버스의 차체와 의장 등을 디자인했던 인물이 전영선 소장이다. 이후 신진자동차(현 한국GM)에서 설계 및 디자인 부문에 근무하면서 한국 자동차 수출 초기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30년간 축적된 다양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를 설립하여 자동차 관련 데이터를 분석하는 등 국내외 자동차 및 교통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컬럼 기고 등 여러 외부활동을 통해 한국의 자동차문화를 알리고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주식회사 카프로 대표이사 이상규(철탑산업훈장)

1972년 LG화학의 전신인 (주)럭키의 수출부에 입사하였다. 싱가폴 지사 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70~80년대 국내 석유화학 제품 수출 진작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 석유화학의 초창기에 황무지와 같던 해외수출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개척노력은 우리 석유화학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주)카프로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이래, 각고의 경영혁신을 통하여 금융위기의 여파를 극복하며 2010년 창사 40년 이래 최고 수준의 경영성과를 달성하였다.

기존 동남아에 국한되어 있던 유안비료 판매 시장을 호주, 일본 및 남미 등으로 확대하여 연간 2억불 이상의 수출 성과를 거두었다. 이상규 대표는 한국발포스티렌재활용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1994년 21%에 머물렀던 스티로폴 포장재의 재활용율을 2000년 51.3%까지 신장시키는 등 자원 재활용 측면에도 기여하였다.



 이탈디자인 주지아로 대표 조르제토 주지아로(철탑산업훈장)


한국 자동차의 고유모델로써 최초로 수출된 현대자동차의 “포니”를 디자인한 장본인이다. 포니는 1976년 에콰도르에 5대가 수출된 것을 시작으로 1982년 포니2가 나오기 전까지 9만 2천대의 수출을 기록하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발돋움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한국 자동차와 유난히 인연이 깊은 주지아로는 마티즈, 렉스턴, 소나타, 매그너스 등의 디자인을 담당하면서 한국 자동차의 디자인 수준을 한껏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 디자인한 코란도 C는 지난 6월 이후 매월 3000대 이상의 수출 실적을 기록하면서 한국 자동차 수출의 새로운 효자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주)웰크론 대표이사 이영규(철탑산업훈장)


이영규 대표는 왕십리 세탁비누 공장장의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유했던 가정 형편은 아버지의 공장 부도로 급격히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때 그는 사업을 하더라도 절대 어음거래는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졸업 후 동양나일론(現 효성)에 들어가 극세사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의 한 전시회에서 안경 닦는 용도로 극세사가 출품된 것을 보고 “바로 이거다!”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당시 의류에만 쓰이던 극세사를 산업용으로 개발하면 부가가치가 높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후배와 둘이 단돈 2000만원으로 1992년 (주)웰크론을 설립하였다. 창업자금은 6개월만에 바닥났다. 보험업을 하는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포기할까도 생각했었지만 거래처의 문을 두드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로 극세사 제품을 취급하는 독일 교포를 소개받아 스웨이드를 수출한 것이 웰크론의 첫 번째 수출이었다. 시장의 반응은 훌륭했다.

유럽에서는 청소 도구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했고 1년여의 연구 끝에 극세사 클리너가 탄생했다. 이렇게 시작된 유럽시장 진출이 점점 많은 주문으로 이어지면서 이 대표는 열흘 동안 지구 한 바퀴를 돌 정도로 빡빡한 상담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유럽시장의 성공적 진출로 웰크론은 설비확장이 시급해졌다. 1997년 9월, 제일은행 지점장으로부터 “사업성보다는 당신의 진실함을 믿고 대출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대출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 달뒤, IMF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수입한 기계의 통관비는 2.5배로 뛰고, 대출이자도 치솟았지만 ‘위기를 기회로’라는 이 대표의 신념에 따라 사업을 이어나갔다. 그 결과 ‘97년 28억원이었던 매출이 ’98년 78억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이 대표의 생산시설 확장은 아주 적기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새로운 수출시장인 미주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 웰크론은 당시 미주에서 유일하게 극세사를 수입하고 있던 3M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당시 3M은 극세사의 선두주자였던 일본으로부터 원사를 수입하여 쓰고 있었다.

1998년 3월, 미국 클리너 전시회(ISSM)에 참가한 이 대표는 바로 3M 부스로 찾아갔다. 그들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최선을 다해 제품을 설명하고 넉넉히 샘플을 건네주고 돌아왔다.

정성에 감동했는지 3M의 구매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하지만 거래가 성사되기까지는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3M이 요구하는 수준까지 도달하기 위해 웰크론은 그 기간 동안 샘플만 1.5톤 트럭 두 대분을 제출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현재는 월마트, 타겟 등 굴지의 유통업체에 웰크론의 제품이 입점해있다.



 (주)SK에너지 과장 최영식(철탑산업훈장)


1980년부터 에너지 산업에 종사하며 12년간 출하 총반장으로 석유제품 수출 터미널을 지켜왔다. 생산된 석유제품의 신속하고 안전한 수출을 위해서는 선박이 안전하게 접안하여 제품을 신속하게 출하할 수 있는 대형 부두의 건설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최영식 과장이 총반장을 부임한 1999년은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기업환경이 극도로 어려워지던 때였는데, 대규모의 비용이 발생하는 터미널 건설 사업에 대해 일부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 과장은 “이전에는 10만 배럴짜리 부두를 통해 내수 판매하다가 가뭄에 콩 나듯이 수출하였는데, 이렇게 큰 대형부두가 생기면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수출 증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사명감으로 항만 터미널 구축 업무를 끝까지 완수하였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배관 공사였다고 그는 회상한다. 탱크에서 나오는 크고 작은 배관들을 신설 및 연결 하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완공 후 첫 서비스 준비 작업 때, 배관이 잘못 연결되어있다는 동료의 긴급한 외침이 들렸다. 밤을 지새우며 4km에 달하는 배관을 일일이 점검하였다. 결과는 이상무. 하룻밤의 해프닝이었지만 얼마나 긴장했던 순간이었는지 모른다.

2000년 이후 유럽, 칠레 등 세계 곳곳으로 석유제품이 수출되면서 수출물량이 급격하게 증가하여 선박 1척당 1백만 배럴 이상을 선적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선적시간이 2.5일 이상 소요되어 선박체선료 증가, 터미널 탱크 운영 어려움 등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났다. 최 과장은 설비 증축 없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기존 2개만 사용하던 로딩암을 간단한 설비 개선을 통해 3개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결과 선적기간을 1.5일로 40%나 단축하면서 유례없는 출하시간 단축을 이루어내었다.

해외로 나가서는 중국의 아스팔트 저장, 출하시설을 구축함으로써 8천억 원대의 중국 특수 아스팔트 시장 개발의 선도자적 역할을 수행하는 등 SK에너지를 국내 수출 2위의 기업으로 만드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지금도 최영식 과장이 근무하는 석유출하2팀은 매일 “수출로 대박내자! 대박! 대박! 대박!”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일선현장에서 대한민국 수출 증진을 위해 오늘도 땀흘리고 있다.



 (주)대성엘텍 이사 김현수(석탑산업훈장)


26년간 카 오디오․비디오․네비게이션 등 자동차용 멀티미디어 제품 개발의 외길을 걸어왔다. 대우전자 시절 수출 시장 현지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13개국을 돌아다녔다. 쌓인 연구와 시장 조사의 열매로 1998년에는 자동차용 음향기기를 17개국에 총 50만대 이상 판매하는 실적을 올렸다.

2001년 대성엘텍으로 이직한 이래 3,500만 불에 불과하던 당사 수출을 금년 현재 7,500만 불까지 성장시켰다. 여기에는 독일, 중국, 태국, 사우디 등으로 수출시장을 다변화한 김현수 이사의 시장개척 의지가 한 몫 하였다.

최근에는 동사에서 한국GM용 AVN(Audio Video Navigation)장치의 개발 총책임자를 맡고 있다. 한국GM AVN 프로젝트 진행은 2007년 초에 시작되어 2년의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2008년 말 세계 금융경제 불황으로 인하여 차량 출시가 연기되자 그 동안 제품개발에 투입된 막대한 인적, 물적 비용으로 인해 회사에 큰 손실을 초래할 수 있는 어려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개발팀을 격려하며 기다렸고, 다행히 2009년 중반부터 본 프로젝트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개발초기 시점과는 달리 내부 개발조직과 협력업체 등의 많은 변동이 있어 프로젝트는 난국에 부딪혔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개발조직을 재정비하여 밤낮으로 제품 개발을 위해 노력하였고,

그 결과로 2010년 하반기에 AVN 네비게이션 제품을 성공적으로 승인‧양산하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다. 현재는 쉐보레, 알페온 등 차량에 AVN을 장착하여 미국·일본 업체 등 세계 유수의 업체와 동등한 수준으로 공급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유희준(옥조근정훈장)


휴대폰으로 실감나는 3D 게임을 즐기는 것은 많은 젊은 세대들의 일상이 되었지만, 유희준 교수가 없이는 이러한 오락도 즐길 수 없었을지 모른다.

‘91년부터 현대전자(현 하이닉스) D램 설계실장으로 근무하며 초기 D램 기술개발을 주도하던 유희준 박사는 ’95년 학계로 복귀하여 시스템반도체(SoC) 분야에 집중하여 세계 최초의 RAMP(RAM-Processor)칩을 개발하였다.

하나의 칩으로 CPU, D램, S램의 기능을 집적시켜 휴대기기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한국과학기술원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 양성을 통한 산업 기반 강화에 힘을 쏟고 있다.


 삼성물산(주) 부사장 이철우(석탑산업훈장)

이철우 부사장에게는 특별한 사명이 있다. 플랜트 수출을 통해 전 세계의 낙후되고 미개발된 지역의 삶의 질을 개선시킨다는 것이다.

중국, 싱가포르, 태국, 인니,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이집트, 멕시코, 가나, 사우디, 등지에서 약 44件, 總 53억불 규모의 플랜트 수출을 성사시킨 對정부 사업개발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다.

1990년대 초 아프리카 가나에서 석유제품 저장설비 사업을 수주하고 사업이 진행되는 중, 가나가 세계은행(World Bank)의 부채탕감계획에 포함되면서 사업은 존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자 이철우 부사장은 세계은행과 적극 협상에 나서 사업자체를 민영화함으로써 사업을 계속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미래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데도 힘써,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대한 중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캐나다 온타리오에 태양광/풍력 발전단지 건설을 제안하여 성사시켰다. 발전단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지 원주민들의 반대에 부딪치자 현지 직원들은 원주민들의 춤을 배우고 함께 음식을 나누며 친밀감을 형성했다.

이철우 부사장은 성공적인 단지 구축을 위해서는 원주민들과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이를 지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원주민 마을과 발전단지 구축에 대한 MOU를 체결할 수 있었다.

차세대 청정연료 바이오디젤의 원료인 팜오일 사업을 위해 인도네시아 현지의 농장을 직접 인수하고 식량자원 사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주)씨젠 회장 천경준(석탑산업훈장)

지금은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휴대폰에 알람 기능이나 진동 기능을 탑재하는 것은 이동통신 초기였던 90년대 초반에는 혁신적인 생각이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융합하여 세계 2대 브랜드인 삼성전자의 휴대폰을 탄생시킨 일등 공신이 바로 천경준 전 삼성전자 부사장이다.

천경준 전 부사장이 한양대 전자공학과 졸업 후에 삼성전자에 입사한 것은 1977년. 무선분야에 근무하던 경력을 살려 삼성이 차세대 사업으로 내세운 휴대폰 사업에 참여했다.

한국 이동통신의 초창기였던 1980년대에는 국내 휴대폰 개발경험을 가진 기술자가 없었음은 물론 휴대폰 기술을 이전해 주는 국가도 없었다. 결국 자체개발을 시도했으나, 기술력 부족으로 모토로라 휴대폰보다 성능이 떨어지고 고장이 많아 판매를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천경준 전 부사장은 실패를 하면 철저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개선하여 같은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설계에 반영하였다. 모토로라 휴대폰과의 비교 분석을 위해서 당시 한 대에 300만원이 넘던 모토롤라 제품을 10개나 구매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술 연구에 매진했다. 산악지형이라는 한국의 특성 때문에 삼성전자는 통화품질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다. 연구소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산악지대의 여관방에서 밤을 새우며 일하는 날이 허다했다. 미국 수출용 휴대폰을 개발하기 위해 현지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테스트하다가 현지 주민의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있었다.

야간 당직을 하며 순찰을 할 때의 일이다. 당시 수요일은 가정의 날로 지정되어 직원들은 6시까지 강제로 퇴근하도록 하고 있었다. 야간에 순찰을 도는 중 한 연구실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 보았더니 몇 명의 애니콜 연구원들이었다. 회사 방침에 따라 퇴근을 했다가 몰래 다시 들어와 연구에 매진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천경준 전 부사장은 야식을 사주며 격려해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삼성이 개발한 7번째 휴대폰까지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실패에 굴하지 않는 끊임없는 연구의 결과 당시 선진 제품으로 일컬어지던 모토롤라 제품보다 10% ‘잘 터지는’ 휴대폰을 만들어 냈다. 내구성도 아주 튼튼했다. 당시 천 전 부사장이 몰던 소나타 승용차로 휴대폰을 밟고 지나간 뒤에 통화를 해보았다.

“실장님, 부서지지 않고 통화가 잘 됩니다!”라는 직원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그는 회고한다. 그것이 SH-770, 삼성이 만들어낸 8번째 휴대폰이었다. 이후 삼성 휴대폰엔 ‘애니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애니콜은 7전 8기의 기적인 셈이다.


 (주)황화상사 대표 황성혁(석탑산업훈장)


한 해에 200일 이상을 해외에 있었지만 늘 가슴엔 조선입국의 사명을 품었다. 1989년 현대중공업 영업담당 전무를 끝으로 퇴사할 때까지 400여척의 국산 대형선박을 해외에 판매한 그는 분명 조선입국의 선봉장이었다.

퇴사한 이후에는 선박중개 회사인 황화상사를 설립하여 현장 노하우를 바탕으로 수요자와 공급자를 이어주며 선박 수출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2009년 한국 조선산업의 발전 과정을 담은 “Let There be a Yard"를 출간하여 한국 조선의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현대자동차(주) 기장 김종수(산업포장)

1973년 19세의 나이로 현대자동차에 입사하였다. 포니1, 포니2, 엑셀, 엑센트, 베르나 등 현대자동차의 대표모델의 생산현장을 38년간 지키면서 도장 공정기술 발전과 자동차 품질개선에 공헌하였다.

기존 도장공정에서는 먼지로 인한 품질불량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김종수 기장은 공장내 먼지 분포도, 먼지의 종류, 특성, 장비설비로 인한 분진 등을 철저히 분석하여 장비 설치, 청소방법, 청소주기 등을 망라하는 《설비관리 매뉴얼》을 작성하였다. 이 매뉴얼은 이후 자동화 설비를 갖춘 공장을 설립하는데 응용 및 적용되어 품질 높은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데 기여하였다.

1981년 9월, 약 1개월간 일본 기술연수를 떠났다. 선진 도장기술을 배워오겠다는 일념으로 떠났지만, 일본 현지 기술자들이 기술 교류를 꺼려하여 쉽지 않았다.

현지 기술자들의 눈을 피해 몰래 도장 공정을 꼼꼼하게 살피고, 매일 저녁 기술회의를 하여 동료들이 보고 느낀 점을 취합한 후 보고하였다. 후일 도장공정을 스프레이머신 등으로 자동화하는 과정에는 이 때 몰래 보고 배운 것이 큰 보탬이 되었다.

1992년 이집트 합작법인인 해외단품생산(CKD)공장 신설시 약 2개월간에 걸친 기술지도를 통해 해외에서 한국의 기술적 위상을 한층 더 높이는 한편, 현대자동차의 글로벌 생산체제 구축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는 봉사활동에도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회사 내 기술부문 전문가 모임인 기성회 회장, 조기축구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독거노인 식사대접, 보육원 도우미 활동 등 활발한 사회 봉사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건전하고 신뢰받는 중간관리자상을 보여줌으로써 사내외로부터 존경을 받기에 이르렀다.


 기아자동차(주) 기사 원용희(산업포장)

1977년 입사하여 완성검사 직무를 수행하다가 1984년 출하사무소로 부임하였다. 승용 수출차량 훼스티바(국내명 프라이드)의 수출 개시에 따른 수출차 운송 및 선적작업 전담 조직이 구성되어 1988년 수출자 선적작업 반장의 직책을 부여받고 인천항에 상주 근무를 시작하였다.

자동차를 인천항에서 내보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당시 경인고속도로는 상습 정체에 시달리고 있어서 자동차를 인천항까지 가져가기도 어려웠고, 인천항은 일반화물 공용부두이기 때문에 어렵게 가져온 자동차가 곡물 등에 오염되기도 일쑤였다.

하지만 원용희 기사는 정체를 피해 수출차를 심야에 운송하고, 수출차 외관 품질 확보를 위해 세차를 실시하는 등 열정과 사명감으로 자동차 선적작업을 수행하였다.

원용희 기사는 노조원들의 반발이 있을 때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효율적인 업무 수행에 일조하였다.

2002년도 화성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량이 증가하면서 수출차 선적부두를 인천항에서 평택항으로 변경하였다. 이에 따른 인천항 노조의 반발로 원 기사는 억류를 당하는 등 신변의 위협을 받았으나 단신으로 담판장에 들어가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내었다.

이후 평택항 항만노조 작업원들 간의 갈등이 발생하여 선적 작업이 수일간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하역업체 책임자 및 해당관청 책임자들의 중재 노력도 불구하고 해결의 기미가 없어 수출자동차 물류가 중단됨으로써 기아자동차의 3개 공장의 생산이 중단될 수도 있는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 때, 원용희 기사가 직접 나서 갈등 유발 집단 간 중재를 실시하고 항만노조 작업자들을 개별적으로 설득하였다. 동시에 방송사에 연락 하여 항만노조 작업자들의 선적작업 중단의 사태를 보도토록 조치하였다. 이를 통해 평택항만 노조원들이 여론의 압력을 받도록 하여 다시금 업무 현장으로 돌아오도록 유도하였다.

평택항 항만 노무공급 상용화적용에 있어서도 장기간의 항만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이해집단 간 화합을 유도하는 중재자로써 자동차 수출의 핵심 항구인 평택항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데도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하여 1995년 물류관리용 전산시스템 도입, 2002년 수출차 운송에 RFID 적용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수출차량 물류관리 선진화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주)코리아나 대표이사 전병직(산업포장)


가발산업은 1970년대 우리나라 수출을 이끄는 주요 수출 산업이었다. 전병직 대표는 지난 43여 년 동안 가발분야 외길을 걸은 중소기업인으로 가발 제작 기술 개발 및 가발 수출 증진을 위해 애썼던 가발업계의 선구자이다.

1968년, 가발회사인 진이산업에 평사원으로 입사했을 때만 하더라도 월급을 많이 주겠다고 해서 입사했다. 60년대 말에 가발회사 사원은 초급 공무원의 3배 이상의 급여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한 근무는 쉽지 않았다. 일주일에 퇴근하는 회수는 서너 번. 밤을 새웠다고 해서 다음날 낮에 쉬는 것은 아니었고, 낮은 낮대로 정상근무를 하였다. 바이어들이 몰리면 3박 4일을 잠을 못자는 적도 있었다. 1982년 36세의 늦은 나이로 결혼을 할 때도 일이 우선이었다.

일하다가 혹시라도 잊어버릴까봐 어버이날인 5월 8일을 결혼식 날로 정했다. 오후 2시에 식이 있었는데, 그 당일에도 오전근무를 하고 결혼식장으로 뛰어가서 급히 결혼식을 올렸다.

미성상사(주)에서 상무이사로 퇴직할 때까지 헤어디자이너로서의 창의력을 살려 수많은 제품을 개발해냈다.

불량품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많았다. 1980년대 중반, 중국 공장에서 들여온 수십만 개의 제품이 컬이 너무 강하게 되어 전혀 판매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것을 고심 끝에 스팀을 넣고 다리미로 다려서 완전히 다른 제품으로 만들었다.

"Yaki Weaving"이라는 이름을 붙여 내놓았다. 상품의 반응은 폭발적이어서 25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

출근길 골목에 있는 대중목욕탕에서는 새벽마다 목욕을 막 마친 아주머니들이 나왔다. 물에 젖은 파마머리들이 미처 마르기 전에 탈탈 털고 나오는 모습이 무척 청결해보였다.

여기서 착안한 것이 1981년 출시한 “웨트 룩” 스타일 가발이었다. 세계 가발트렌드를 선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 결과 당시 업계 26위의 미성상사(주)가 가발 업계 1위로 도약하게 되었다.

1992년, “세계인을 유혹하는 코리아나”라는 비전을 가지고 (주)코리아나를 설립하고, 1993년에는 중국 천진에 현지 법인을 설립하여 수출에 박차를 가했다.

지금까지 미국,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일본, 중국, 홍콩 등 7개국에 총 2억8천9백만 불을 수출하였다. 창업을 해서도 특유의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2001년엔 업계 최초로 “테프 컬” 스타일 가발을 개발하여 업계의 일대 혁신을 이루고, 2002년에는 헤어피스 “YAKY PONY"를 개발하여 가발시장을 주도하였다.

2002년부터 한국모발제품수출협의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동종업체간 기술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최신제작기술을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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