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에 환구단을 복원해야 한다

고궁박물관(Royal Museum) 간도(間島) 독도(Dokdo) 특별전시해야 한다.


대한국 제실박물관을 계승하는 국립박물관은 황실박물관(Royal Museum)을 표방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이므로 서울지방박물관이 아니라 국립고궁박물관이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여야 옳다. 일제 통감부,총독부는 대한 황실 궁내부가 관리한 전적,고문서를 총독부,경성제대로 불법 이관하고 국외로 불법 반출하여 현재 교육기관,기록기관과 외국이 임시 소장중이다.

▲  간도협약 무효를 위해   간도의날 지정하고 설명하고 있는 김원웅 (전.국회통외통 위원장.3선) © 신대한뉴스
대한 황실 미술공예품은 1909년 11월 순종황제가 창경궁 (昌慶宮) 제실박물관을 개관하여 일반에 공개하였고 경운궁 황실박물관으로 이관 후 총독부 고적조사 수집품,도굴 문화재,구입 장물,사찰 기탁품과 함께 총독부박물관으로 불법 이관되어 대한 광복 후 서울지방박물관이 임시 소장중이므로 문화재청은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하고 제실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하여야 한다.

대한국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을 계승하는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은 외국으로 불법 반출 후 환수하였거나 고등교육기관·문화서비스기관이 임시 소장중인 실록·의궤·일기·등록·국새·칙령(勅令)·도성궁궐도·유리원판사진 등 대한 황실의 역사·문화를 대표하는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이관·귀속하여야 하며 대외관계실을 신설하고 궁궐건축실을 통치체제실로 개편하여야 한다.

국립고궁박물관은 대한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태극기(太極旗),애국가,국새,칙령(勅令),동해(East Sea) 독도(Dokdo)·간도(間島),도성·궁궐,환구제,종묘제,사직제를 적극적으로 전시 홍보하여야 하며 역사성·안전성·접근성이 탁월하므로 황실문화재 관리청으로서 이관·귀속한 국보급 황실문화재를 전문가,문화향유층 일반에 공개하여 황실문화의 보급·선양에 적극 활용하여야 한다.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에 환구단을 복원해야 한다.


한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0월 상순 국중대회를 열어 둥근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하늘에 제사를 올려 국태민안을 기원해 왔다. 1897년 고종은 대한제국이라 국호를 정하고 심순택(沈舜澤)의 상소에 의해 경운궁 대안문 앞에 환구단(圜丘壇)을 쌓고, 10월11일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환구단에 나아가 천제를 봉행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다.

▲   경운궁 양이재(慶運宮 養怡齋)  © 신대한뉴스
고종황제는 광무 원년 경운궁 앞에 환구단을 축조하였는데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며 단이 삼층이었다.1층은 장광이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고, 황지지위(皇地祗位)는 1층 북쪽 서편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대명천(大明天)과 야명성위(夜明星位)는 2층 동쪽,서쪽에 있고,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수(二十八宿)·오악(五岳)·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은 3층 동쪽에 있으며, 운사(雲師)·우사(雨師)·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는 3층 서쪽에 있다.

환구단의 건물과 터를 관리한 일제 총독부가 1913년 대한제국 황단 환구단을 헐고 호텔을 지었고 환구단 터는 현재 원형 복원이 불가능하며 광무 3년(1899년)에 축조된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8각 3층 건물 황궁우(皇穹宇)와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는 돌로 만든 석고(石鼓) 3개만 남아 있다.

일제 총독부가 제천단 환구단(圜丘壇)과 대한 황궁 경운궁 동편 권역을 철거하고 호텔,경성부를 악의적으로 설치하여 민족정기를 훼손하였으므로 경운궁과 환구단의 역사문화경관을 침해하는 경성부청사를 철거하고,경운궁 대안문 앞에 환구단을 복원, 환구대제를 봉행하여 민족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

대한제국 건국하고 간도 독도 통치한 고종황제 이셨다.
▲  간도 그림화 시킨 페러디   © 신대한뉴스
단군(檀君)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서로 웅(雄)함을 다투다가 고려(高麗)에 이르러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였다.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며 삼한(三韓)을 아우르는 것이니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대한국(大韓國)을 국호로 한다.북으로 말갈(靺鞨:간도)이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남으로 탐라(耽羅國:제주도)가 귤과 해산물을 공(貢)하였다.고종황제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에 일통(一統)의 업(業)을 세우시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에 백악(북악산)과 목멱(남산) 사이의 경운궁 대안문 앞 환구단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호(號)를 정하여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였다.1899년 8월 17일 반포된 대한국 최초의 헌법의 명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였으며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는 총 9조로 구성되어 있으며,대한국 황제의 육해군 통수권,계엄령 발포권,법률 제정·반포권,문·무관 임명권,조약 체결·선전·강화권 등을 규정하고 있다.

▲ 간도협약 무효를 위해   간도의날 지정하고 설명하고 있는 김원웅 (전3선국회의원.국회통외통 위원장) © 신대한뉴스
대한국(大韓國)은 고종황제가 한반도 간도 녹둔도 제주도 대마도 동해 독도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1897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은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널리 표명하기 위하여 10월 12일 환구단에서 대한국을 선포하고 광무황제로 즉위하였는데 고종황제는 오전 2시 환구단에 나아가 천신(天神) 황천상제(皇天上帝)와 지신(地神) 황지지(皇地祗)에 고하는 환구대제를 봉행한 뒤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 의자에 앉아 12장 곤면(袞冕)을 입고 새보(璽寶)를 받았다.

1882년 5월 22일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식에 태극 문양을 흰색 바탕에 빨강과 파랑으로 그려 넣은 태극도형기(太極圖形旗)를 임시 국기로 사용한 후 국기 제정의 필요성을 느낀 김홍집은 태극도형기에 8괘(卦)를 첨가하여 태극과 8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1882년 9월 박영효는 고종(高宗)의 명을 받아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으로 가는 선상에서 태극과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 도안의 기를 만들었다.고종은 1883년 3월 6일 왕명으로 이 태극과 4괘 도안의 태극기(太極旗)를 국기(國旗)로 제정·공포하였다.

광무 원년 경운궁 앞에 제천단을 축조하고 이름을 환구단 또는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는데,역군과 장색 천여 명이 한달이 못 되어 다 건축을 하였는데 단이 삼층이었다.1층은 장광이 영 척으로 144 척이며 둥글게 돌로 쌓아 석 자 높이로 쌓았고, 2층은 장광이 72 척이며 석자 높이로 쌓았고, 3층은 장광이 36척이며 석자 높이로 둥글게 쌓아 올렸고,바닥은 벽돌을 깔고 황단 주위를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세웠고 남문은 문이 셋이다.

경운궁 대안문부터 환구단까지 좌우로 군사들을 질서정연하게 배치하고 황색 의장으로 호위하였는데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어가 앞에는 대황제의 태극국기가 먼저 지나갔고 대황제는 황룡포에 통천관을 쓰고 금으로 채색한 연을 탔고 그 뒤에 황태자가 홍룡포를 입고 면류관을 쓴 채 붉은 연을 타고 지나갔으며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서 환구대제를 봉행하고 대한국을 선포한 후 경운궁으로 이어한 고종황제는 태극전에서 백관의 축하를 받고 낮 12시에 명성황후를 추존하고 2시에 순종을 황태자를 책봉하였다.

1873년 친정(親政)을 시작하고 1887년 최초로 전등 점화하여 전기를 사용한 건청궁에서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한 고종은 대안문(大安門) 앞 환구단에서 자주 독립을 천명하고 대한국(大韓國)을 건국하였으며 한반도 간도 제주도 독도 대마도 녹둔도를 아우르는 4천리 영토를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와 애국가를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광복(光復)운동을 적극 지원한 고종황제를 고액권 화폐 도안 인물로 선정하고 경운궁 앞 태평로를 고종로로 개칭하여야 하며 황토현의 기념비전 앞에 고종황제 동상을 건립하여야 한다.

조선쇠망,한일합방 아닌 대한 병탄(大韓倂呑),경술늑약(庚戌勒約) 에 대하여..

일제(日帝)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승리를 위해 대한제국의 영토를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하여 1900년 10월 25일 고종황제 칙령(勅令) 41호에 의거한 대한국령(大韓國領) 독도(獨島)를 1905년 2월 불법 강점하고 미국과 1905년 가쓰라태프트밀약, 영국과 영일동맹,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을 체결했다.

일제는 대한국 독점지배 승인을 얻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으며 고종황제는 일제의 강박에 의한 을사늑약을 폭로하고자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고 을사늑약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 대한국의 외교권을 부정하는 일본과 영국의 방해로 특사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일제의 강박으로 이루어진 을사늑약을 폭로하고자 한 고종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 통감부는 7월 20일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강력한 대한국 침략을 위해 7월 24일 군대 해산,사법권·경찰권의 위임,법령권 제정·관리임명권 간섭을 골자로 하는 정미늑약(丁未勒約)을 강제 체결했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 파견으로 일제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대한국 고종황제는 정미늑약에 항거한 정미대한독립운동,대한인국민회,대한독립의군부,대한광복군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 등 대한광복운동의 상징적 구심점으로서 고액의 내탕금(內帑金)을 지원하는 등 대한광복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대한국이 일제에 병탄(倂呑)당하였고 1919년 1월 일제 총독부의 독살에 의한 대한국(大韓國) 고종황제의 붕어(崩御)는 2·8 대한광복선언, 3·1 대한광복운동, 6·10 대한광복운동,11·3 대한광복운동,한성정부,대한국민의회,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한 대한광복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1945년 8월 15일 대한 광복(光復)을 했다.

간도(間島) 독도(獨島) is korean territory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대한시대가 시작되어 대한제국이 1919년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대한국(大韓國)은 한반도 간도(間島) 제주도 녹둔도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북으로는 말갈(靺鞨:간도)에서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대한국 고종황제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치하였다.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1902년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임명하여 간도(間島)에 대한 직접적인 관할권을 행사하였으며 1905년 11월 17일 고종황제가 비준하지 않아 불법, 무효인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9년 9월 4일 간도의 이권을 얻기 위해 불법적으로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고 대한제국령 간도의 영유권을 청에 불법 양도했다.

3·1 대한광복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한민족사 최초로 주권재민, 삼권분립을 선언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 수립되어 대한광복운동을 전개하여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간도(間島)가 1945년 대한 광복 이후에도 미수복 영토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100년이 지난 2009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중국에 간도영유권을 주장한 적이 없다. 정부는 헌법을 개정하여 대한민국의 대한제국 국체 및 영토 계승을 공식 천명하고 중국과 요하와 압록강의 중간선을 한중 국경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1869년 조선에 파견되었던 일본 외무성 관리가 일본 정부에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朝鮮國交際始末內探書)를 제출했다. 이 내탐서에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조선 영토가 된 시말(始末)에 대해 조사하고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령이라고 결론지은 내용이 나와 있다. 1877년 일본 정부 최고 권력기관 태정관(太政官)은 태정관 지령문(太政官指令文)을 통해 울릉도 독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했다.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백악(白嶽:북악산)과 목멱(木覓:남산) 사이의 경운궁(慶運宮) 대안문 앞 환구단(圜丘壇)에서 천제(天祭)를 올리고 광무황제에 즉위하며 천하에 큰 한(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므로 국호(國號)를 대한(大韓)이라 하고 1897년을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여 대한시대가 시작되어 대한제국의 국체 및 영토가 대한민국으로 계승됐다.

대한국(大韓國)은 한반도 간도(間島) 제주도 대마도(對馬島) 녹둔도(鹿屯島) 동해(East Sea) 독도(Dokdo)를 비롯한 인접 도서,해양을 통치하고 태극기(太極旗),애국가를 상징으로 한 제국으로서 북으로는 말갈(靺鞨:간도)에서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는 탐라(耽羅:제주도)을 거두어 귤과 해산물을 공(貢)받은 고종황제(高宗皇帝)는 제주에서 간도까지 남북으로 4천리를 통일(統一)했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국 정부는 칙령(勅令) 41호를 공포하여 울릉도를 강원도의 군으로 승격하고, 울릉군의 관할 구역으로 독도(獨島)를 포함시키고 이를 대한국 관보를 통해 공포하고. 1910년 경술늑약(庚戌勒約)으로 일제에 불법 병탄(倂呑)당한 대한국은 1945년 8월 15일 일제로부터 대한국의 국권을 회복하는 대한 광복(光復)을 하였고 대한제국 국체 및 영토 계승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1909년 11월 대한국 최초로 개관한 창경궁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을 계승하는 국립고궁박물관은 제실박물관 100주년을 기념하여 대한국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태극기(太極旗),애국가,경운궁,환구단(圜丘壇),국새,칙령(勅令),동해(East Sea), 독도(Dokdo),간도(間島)를 적극적으로 전시 홍보하여 역사적,국제법적 간도와 독도 영토 주권을 확립하고 대한국(大韓國) 영광의 112년 역사를 바로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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