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존칭은 붙이지 않고 이 글을 쓰겠습니다. 링컨이나 이승만에게 꼭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는 같은 맥락에서입니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도 글을 쓰거나 강연을 할 때에는 그저 ‘이명박’이라고 하지 굳이 ‘대통령’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1월 10일 10시에 롯데 호텔 2층 대회의실에서 헌정회의 총회가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고 직무대리로 있는 목요상이 내게 전화를 하였는데 다행히도 그 시간에 다른 약속이 없어서 지팡이를 짚고 회의장에 갔습니다. 참석자 명단에 싸인을 하니 ‘제 14대 국회의원 김동길’이라고 적힌 명찰 하나와 누런 싸구려 봉투를 하나 주는데 그 속에는 거마비 5만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점심을 함께 하기로 되어 있는지 테이블이 잘 마련되어 있었고 내 옆자리에는 경제부총리를 지낸 이승윤과 보건부장관을 오래 한 문태준이 앉아있는데 400명 넘는 전직 국회의원들이 모여 앉아, 입추의 여지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10시 30분 정각에 개회선언이 있어서 나는 회장선거에 투표까지 하고 집에 돌아가도 12시에 약속한 손님을 맞아 점심을 함께 하기에는 지장이 없으리라는 생각에 안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회벽두에 해남 출신의 김봉호가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이 총회 자체가 불법이어서 무효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 뒤를 이어 경기 부천의 박규식이 등단, 특유한 바리톤 목소리로 “이 모임은 절대 안 된다”고 야단을 쳤습니다. 금산 출신 유한열은 참석자를 모두 압도할 만한 우렁찬 목소리로 한바탕 떠들고 나가더니 아리송한 한 마디를 던지고 물러났는데 그는 총회를 하자는 것인지 하지 말자는 것인지 분명치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경북 의성 출신 정창화가 나와서, “오늘 사회를 보게 된 회장 직무대행이 비록 민주당적을 갖고 있다 하여도 결코 불법은 아니니 속히 회의를 진행합시다”라고 한 마디 했을 때 박수가 쏟아져 나온 것을 보면 ‘불법시비’가 그의 발언을 반박하기 위해 김봉호는 또 나오고 계속 야단스러워 자리를 뜨는 회원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10시 반 쯤 일어나 나왔으므로 회장선거에 투표도 해 보지 못하고 거마비 5만원만 받아가지고 돌아와 점심에 온 목사 서광선에게 세뱃돈으로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누가 회장에 당선되었는지도 모르고 돌아온 것입니다. 국회를 졸업한 노인들이 현역 국회의원들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니, ‘한류’니 ‘무역 1조’가 더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그 꼴을 보고 더욱 한심하게 느껴진 것은 거기 등장한 인물들이 나와는 특별한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김봉호는 해남에서 가장 존경받던 훌륭한 목사 이준묵이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이어서 그의 아름다운 부인과 함께 우리 집에 들려 저녁도 함께한 추억이 있습니다. 박규식은 활달하고 머리 좋은 후배이어서 그의 지역구에 선거 때 가서 목이 쉬도록 찬조연설을 해준 기억이 새롭습니다. 유한열은 야당의 거목 진산의 아들일 뿐 아니라 연세대 출신이어서 더욱 가깝게 느껴온 후배입니다. 그가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면 나는 그에게 한 표를 던졌을 것입니다.

이용택은 정보부에 있으면서 한 때 나를 많이 괴롭혔지만 내가 서대문 구치소에 갇혀있을 때 감방에까지 찾아와 내 신세를 제가 한탄도 하고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정’ 때문에 가까워졌고 그가 ‘반공투사’라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더 큰 인물이 되리라고 믿었는데 어쩌다 그렇게 밖에 안 되었는가,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요상이 헌정회의 새 회장으로 무투표 당선되었다는 소식을 저녁에 뉴스로 듣고 일단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일이 안 될 듯 안 될 듯 하다가도 되는 나라에 살고 있음을 감사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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