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촉즉발의 상황이다.

총선 패배 이후 민주통합당 내에선 친노(親盧)와 비노(非盧) 양측 진영이 당권을 놓고 치열한 물밑 암투를 벌이고 있다.

현재 당 주류를 이루고 있는 친노 진영은 현 지도부가 조기에 당을 수습하고 안정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문성근 대행카드’를 내놨다. 당권사수를 위한 일종의 출구전략인 셈이다.

반면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비노 진영은 쇄신을 위해선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 지도부 전원이 사퇴하는 동시에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가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번 총선 패배를 당권 탈환의 기회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양측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가운데 공천 막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보이지 않는 손’ 문재인 상임고문이 어떤 목소리를 낼지 주목된다.

문 고문은 그토록 자신했던 낙동강벨트의 초라한 성적표 때문에 대선주자로서의 입지가 급격히 약화돼 자숙모드에 들어간 상황이다.

한명숙 대표가 총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하면서 민통당은 일단 당헌·당규에 따라 지난 1.15 전당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문성근 최고위원을 권한대행으로 하는 체제로 전환했다.

민통당 당헌·당규에 의하면 당 대표 궐위시 차순위 득표를 한 최고위원이 다음 임시전당대회가 열릴 때(2개월 이내)까지 대표 직무대행을 맡게 돼 있다.

친노 진영은 “대선 국면을 앞두고 대안이 마땅치 않아 문성근 최고위원을 대행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명숙 대표도 입장이 다르지 않았다. 한 대표는 13일 사퇴 기자회견에서 “최고위원들과 당직자들이 당무 공백을 최소화하고 당을 안정화하는 데 최선을 다해 달라”고 말했다. 문성근 대행을 중심으로 당을 이끌어달라는 당부였다.

문성근 대행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당헌·당규에 따를 것”이라고 말해 대표 직무대행 수락 의사를 밝혔다. 승계 대표가 다음번 전당대회 관리자이기 때문이다.

친노 진영이 이번 총선에서 네 배 이상 몸집을 불려 세(勢)를 확대한 만큼 ‘문성근 체제’를 주축으로 한 기존의 주류가 앞으로도 당을 움직일 가능성이 높다. 친노 진영의 핵심 인사들이 문 대행을 차기 전당대회 당 대표 주자로 낙점했다는 후문도 있다.

그러나 문 최고위원은 이번 총선에서 낙선해 대표 대행으로는 적당치 않다는 얘기가 많다. 이에 ‘문성근 체제’가 의외로 단명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비노 진영 내에선 총선 패배 책임이 있는 지도부 전체에 대한 불신과 비토 분위기가 팽배하다. 특히 공천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칼을 휘둘렀던 친노 진영에 대한 불만이 크다.

박지원 최고위원을 비롯한 일부 최고위원은 겉으로 “한 대표가 책임지고 물러난 만큼 당분간 상황을 두고 보자”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미 동반 사퇴를 각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동반 사퇴론’에는 당내 최대 계파인 친노 진영에 한시적 당권도 내줄 수 없다는 견제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비노 진영 내에선 “대행체제에 속한 최고위원 가운데 일부(친노)는 차기 전당대회에 출마해선 안된다”며 불공정성을 지적한다.

당내 대선 주자인 손학규 전 대표와 정세균 상임고문도 여기에 공감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경우 김진표 원내대표가 대표 직무대행을 맡거나 최고위원 간 정치적 합의로 비대위를 구성하는 방법, 19대 당선자들끼리 새 원내대표를 뽑아 비대위원장을 맡기는 방법 등이 거론된다.

비대위원장으로는 이해찬 상임고문, 문희상 전 국회부의장, 김한길 전 의원 등이 거론된다. 김진표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든지, 아니면 다음 주 초로 예정된 ‘19대 총선 당선자 대회’에서 새 원내대표를 뽑아 대표대행을 맡기는 방안도 나온다.

지난 1.15 전당대회와 4.11 총선 공천 배후의 핵심으로 지목된 문재인 상임고문이 ‘문성근 대행체제’와 관련, 어떠한 입장을 밝힐 지에도 관심이 쏠린다.

문 고문은 총선 이후 지역구 일정 소화를 앞세워 잠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 일각에선 문 고문이 공식석상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를 ‘당의 총선 패배 책임론’ 때문으로 보고 있다.

특히 통합진보당 이정희 공동대표의 조작경선 논란에 따른 이상규 당선자의 공천 승계 과정에 문재인 고문이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비노 진영에선 “제 식구를 버리고 무원칙한 결정을 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게다가 저질 막말 파문이 한창이던 지난 주말 그가 한명숙 대표에게 전화를 해 파문 당사자인 서울 노원갑 김용민 후보를 감싼 것으로 알려지며 “접전지역 패배를 안겼다”는 원성도 들린다.

수도권 후보들을 중심으로 “대선주자라는 분이 그렇게 감이 없느냐. 문 고문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이라며 책임론을 제기하고 있다. 또 "'문재인 대통령 만들기' 돌격대장 역을 자임하고 있는 김어준 등 나꼼수 패거리를 두둔한게 1당 탈환 실패의 가장 큰 책임"이라는 지적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나홀로 당선된 대권주자에게 낙동강벨트 패배는 치명적이다. 지역 정가에선 야권의 다른 잠룡인 김두관 경남지사가 이번 총선을 계기로 문 고문에게 선전포고를 던졌다는 말이 나온다. 

김 지사는 지난 12일 논평을 내 “국민들은 야당을 먼저 심판한 것이다. 야당에도 성찰과 혁신을 요구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고 말했다. "부산에서도 야권이 기대했던 의석수를 얻지 못했다"고 지적, 문 고문을 겨냥한 듯한 인상까지 남겼다.

현재의 텁텁한 분위기상 문재인 고문이 ‘문성근 대행체제’와 관련, 공개적으로 찬성 입장을 밝히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13일 밤 열린 상임고문단 회의도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문재인-문성근 ‘文文 듀오’의 두터운 친분에 비쳐보면 비공개 석상 및 전화 통화를 이용해 문 고문이 문 대행체제를 강력히 지원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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