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말썽 많고 시끄러웠던 19대 총선이 끝났다. 승자와 패자는 엇갈렸지만 이제부터는 마음을 가다듬고 깨끗하고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위해서 모두 매진할 때다. 선거라고 하면 언제나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아무리 공정선거를 강조해도 그에 불복하는 세력이 있으며, 실제로도 완전무결한 페어플레이는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선거가 후보자끼리의 개인적인 대결로 그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거는 사적인 면보다는 공적(公的)인 면이 더 크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공직선거의 경우에는 더더구나 말 할 나위도 없다.

누가 선거에서 당선하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운명까지도 좌지우지된다. 이처럼 중요한 선거가 공명정대하게 실시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대 선거를 살펴보면 그다지 유쾌한 선거는 별로 없었던 듯싶다. 선거가 끝난 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지 않은 때는 한 번도 없었다. 부정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집권당에 의해서 저질러진다. 관권을 동원하는 것이다.

경찰과 군인 그리고 공무원은 언제나 집권자 편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 있다. 그들의 임면권이나 인사이동권한을 쥐고 있는 사람이 집권당이나 집권자 측의 사주와 종용에 의해서 움직일 때 부정선거 시비는 나오게 된다. 이것이 가장 극심했던 게 자유당 이승만 정권시절이다. 이승만정권은 1945년 광복을 이룬 다음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며 등장했다.

임시정부에서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은 프린스턴 대학의 박사학위를 내세워 풍찬노숙하며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바쳤던 김구를 물리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74세의 노령에 대통령직을 맡은 후 카리스마 넘치는 개인플레이로 한민당을 박차버리고 자유당을 창당하여 1인 독재의 방패막이로 삼는다.

때마침 북한의 남침으로 6.25사변이 터지자 정치파동을 일으켜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하고 발췌개헌으로 중임(重任)규정을 철폐하여 사실상 영구집권의 길을 텄다.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와 조병옥이 4년 터울로 실시되는 대통령 선거 직전에 사망함으로서 국민의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은 사라졌다. 그러나 실낱같은 희망이었던 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의 당선을 기대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를 놔두지 않고 이승만의 후계자인 이기붕 당선에 총력을 기울인다.

민심은 이미 민주당 장면부통령으로 굳어졌으나 이승만은 관권을 총동원하여 역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를 획책한다. 여기에 감연히 도전한 것이 2.28대구 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였으며 대전과 청주에서도 고교생들이 연거푸 일어났다. 마산에서 터진 3.15의거는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시민들의 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숨졌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커진다. 전북 남원에서 마산상고에 지원서를 제출한 김주열군이 시위도중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그의 어머니 권찬주여사는 마산 시내를 누비며 “내 아들 김주열이를 찾아내라”고 절규했다.

그가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거리를 헤매며 울부짖는 통곡성은 마산뿐만 아니라 전 국민을 울렸다. 아무리 불러도 돌아올 줄 모르던 김주열은 4월11일 홀연히 나타났다. 처참하게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 주검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사진을 1면으로 보도한 동아일보는 날개 돋친 듯 팔리며 국민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멍에를 안겼다. 모두 분노하고 모두 통곡했다. 아! 아! 김주열! 너는 정녕 누구의 손에 죽었는가!

이 때 까지도 대학생들은 봄 방학으로 학교에 나오지 않을 때다. 당시 학기는 4월에 시작했기 때문에 4월4일 첫 개강일이 되었다. 전북대학교 정치학과 학생들은 방학 중 서로 연락하여 시위계획을 짰다. 민주선언문을 프린트하고 각 단과대학에 연락할 수 있는 조직망을 구축했으나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에는 너무나 성글었다.

시위는 예정대로 감행되었으나 사전에 정문을 봉쇄한 경찰병력을 뚫지 못하고 교내 시위에 머문 것은 천추의 한이다. 그리고 4.18고대생들의 궐기로 대학생 데모는 절정을 이루며 한국의 정치를 혁명으로 치닫게 한다.

4월19일 경무대와 내무부 등지에서 대학생 데모대는 쏟아지는 총탄세례를 받으며 푹푹 쓰러졌다. 186명이 죽고 6500여 명이 부상당했다. 4월25일 교수데모는 정식으로 이승만의 하야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4월26일 사임한 이승만은 사저인 이화장으로 옮겼다가 며칠 후 하와이로 망명하며 다시는 조국 땅을 밟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주체인 대학생은 야당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학원으로 돌아간다. 새 정권은 권력싸움에 영일이 없더니 1년도 못되어 5.16쿠데타로 무너진다. 참으로 안타까운 4.19의 추억이다. 52년이 지난 지금도 이 나라는 좌․우 분열이 심각하다.

나라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종북좌파는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을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 4.19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이 뜻을 전하는 것은 그대들이 이 나라를 지킬 책무를 가진 기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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