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가파도 청보리밭

제주의 섬들이 품은 풍경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그중 국토 최남단의 섬 마라도와 이웃한 가파도의 봄 풍경은 유난히 사랑스럽다.

제주 본섬에서 뱃길로 20여 분. 섬에 도착하면 일단 가벼운 차림새로 쉬엄쉬엄 걸어본다. 쪽빛 바다를 곁에 두고 섬 곳곳에 나 있는 작은 길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마음은 너른 바다를 닮아 있다.

봄날의 가파도가 선물하는 바다만큼 푸른 청보리밭 풍경 속으로 마음이 먼저 걸어 들어간다.



가파도의 푸르른 청보리밭 너머로 제주도의 송악산과 산방산이 차례로 보인다.
가파도의 푸르른 청보리밭 너머로 제주도의 송악산과 산방산이 차례로 보인다.

면적 0.84제곱킬로미터, 인구 2백60여 명, 해안선 길이 4.2킬로미터, 섬의 가장 높은 곳 20.5미터. 이것이 가파도를 설명하는 ‘스펙’이다. 여의도 면적의 5분의 1 정도에 불과한 크기의 가파도에는 오름이나 구릉 하나 없다.

가파도에 발을 들여놓기 전, 어느 맑은 봄날 모슬포 인근의 송악산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았는데 초록빛으로 반짝반짝 빛나던 섬이 눈에 들어왔다.

특이한 모양의 섬. 낮은 구릉 하나 없이 접시처럼 평평했으며 그것은, 마치 큰 파도가 몰아치면 잠겨버릴 듯 위태로워보였지만 한참을 들여다보니 더없이 포근해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섬 전체가 온통 초록, 초록빛이다.

바다에서 불어온 큰 바람에 섬이 일렁거렸다. 그 섬을 얼른 밟아보고 싶었다. 청보리밭이 내어준 샛길에 서서 두 팔을 벌리고 그 바람을 함께 맞아보고 싶었다.

가파도는 1653년 네덜란드인 하멜이 제주 부근에서 표류돼 조선에서 14년을 생활하다 귀국 후 발표한 <하멜표류기>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섬이다. <하멜표류기>에는 ‘케파트(Quepart)’라는 지명으로 소개됐는데, 이는 가파도의 옛 이름 개파도(蓋波島)가 연상되는 부분이다.

“일몰은 와이키키 해변보다 아름답다”

가파도는 개파도 외에 개도(蓋島), 가을파지도(加乙波知島), 더우섬, 더푸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가파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1750년(영조 2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제주 목사가 조정에 진상하기 위하여 소 50마리를 방목하면서 소들을 지키려 40여 가구 주민들의 입도를 허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파도가 여행자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은 최근 들어서이다. 사실 가파도는 모슬포에서 뱃길로 5.4킬로미터 떨어진 가까운 섬이지만,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 마라도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었다.


가파도 마을의 집 담장에 그려진 벽화.
가파도 마을의 집 담장에 그려진 벽화.

그러다가 가파도에 10-1코스의 올레길이 생기고, 매년 봄이면 섬의 70퍼센트 이상을 뒤덮는 청보리밭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이곳을 찾는 여행자의 발길이 부쩍 늘게 됐다. 지난봄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1박2일>에 소개된 이후로는 우도나 마라도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했다.

4월의 가파도는 온전히 초록이고 5월의 가파도는 온통 금빛이다. 60만제곱미터(약 18만 평)에 이르는 거대한 보리밭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언덕 하나 없는 평평한 섬이다 보니 청보리밭은 더욱 넓어 보인다. 넓게 펼쳐진 청보리밭은 바다와 멀리 산방산과 그 뒤의 한라산과 이어지며, 눈은 마라도에 닿는다. 초록의 보리와 노란색 유채꽃, 장다리, 보랏빛의 갯무꽃, 여기에 검은 현무암 돌담까지 어우러진 봄의 섬은 그야말로 찬란하다.

큰 바람에 낭창낭창 허리를 굽히는 여린 청보리를 어루만지며 걷는 일은 참으로 기쁘다. 섬을 한 바퀴 도는 길이 4.2킬로미터에 불과하며 북쪽의 상동포구에서 남쪽의 하동포구까지 이어지는 올레길 코스가 5킬로미터 정도로 걷기에도 무리가 없다. 제주에 올레길을 만든 올레재단의 서명숙 이사장은 이 가파도 올레길을 향해 ‘지금까지 땀 흘려 올레를 걸은 도보여행자들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은 길’이라고 표현했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23개의 올레길 중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와 함께 전 코스를 걸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인 듯싶다. 눈 시리도록 푸른 보리밭 구경 실컷 하면서 쉬엄쉬엄 걸어도 두 시간이면 충분한 시간이다. 여기에 다시 배를 타야 하는 상동포구로의 회귀까지 해서 섬을 두루두루 밟고 다니는 시간은 세 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가파도 청보리밭 산책길은 가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A코스(2킬로미터)와 B코스(2.5킬로미터) 두 가지가 있다.

B코스는 해안도로와 연결돼 있어 마라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워낙 작은 섬이라 어떻게 걸어도 상관없지만, 일단 선착장에서 왼쪽 방향으로 가파도 올레길 10-1코스에 진입해 가파도 전체의 해안도로를 한 바퀴 돌아본 다음 청보리길 A코스를 거쳐 전교생이 덜렁 네 명뿐인 아담한 가파초등학교를 지나 B코스를 걸어보는 것도 괜찮다.

섬은 좁지만 바다는 풍성… 해산물 한상 가득

1박을 하게 된다면 동동리 쪽 해변과 하동항에서의 일몰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는 “이곳의 일몰이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의 일몰보다 더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오름을 숨 가쁘게 오를 일도, 대여섯 시간씩 셔츠가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며 걷지 않아도 좋은 가파도가 더 좋아지는 이유는 바로 맛있는 음식들 때문이다.

마라도나 비양도 등 제주의 다른 섬과 달리 땅이 평탄해 농사가 가능했고, 제주도 최고의 낚시 포인트답게 다양한 어종이 서식하며 가파도의 해녀들이 매일매일 건져 올리는 해산물이 최고로 맛있는 곳이 바로 가파도다. 다른 섬들보다 유독 먹을거리가 차고 넘친다는 얘기다.

가파도보다 훨씬 유명한 마라도는 해물자장면 하나로 맛 지도를 완성했고, 비양도는 보말죽이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가파도에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맛난 음식이 많다.

파도가 센 가파도에서 잡히는 해산물은 그 어느 곳보다 맛나다. 해녀의 물질 작업도구가 바위 위에 놓여 있다(왼쪽 사진). 가파리 마을 길 풍경. 평화롭고 한적하다(오른쪽 위). 제주의 봄 바다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북손과 성게비빔밥.
파도가 센 가파도에서 잡히는 해산물은 그 어느 곳보다 맛나다. 해녀의 물질 작업도구가 바위 위에 놓여 있다(왼쪽 사진). 가파리 마을 길 풍경. 평화롭고 한적하다(오른쪽 위). 제주의 봄 바다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거북손과 성게비빔밥.

향긋한 성게비빔밥이나 손칼국수는 기본이요, 가파도의 특산물을 죄다 한 상에 모아놓은 보리밥정식, 이러저러한 해물이 한 접시 위에 푸짐하게 등장하는 해물모듬조림과 구이, 무늬오징어로 만든 다양한 요리와 뿔소라와 보말을 굽고 무치고 버무려 만든 각종 음식까지. <1박2일>에서 ‘용궁정식’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던 가파도의 먹을거리들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해녀가 물질해 온 성게나 조개, 소라, 보말, 톳, 미역 등 자연산 해산물과 어민들이 잡아온 제철 맞은 자연산 활어로 만든 요리들은 미식가의 혀를 춤추게 만든다. 흔한 보리밥정식을 시켜도 상큼하게 묻혀낸 보말무침, 소라무침, 톳을 넣고 끓인 된장찌개에 미역쌈, 홍삼회와 문어숙회, 비린내 하나도 나지 않는 생선국까지, 일일이 열거하자면 손가락 열 개를 다 써도 모자랄 밥상이 펼쳐진다.

툭 건드리면 피부의 색깔이 요란하게 변하는 무늬오징어를 넣고 보글보글 끓여낸 라면도 이 섬에서 맛볼 수 있다. 나선형의 몸통에 삐죽삐죽 솟은 뿔을 달고 있는 뿔소라 구이는 어떠한가.

제주 전역에서 뿔소라가 나오지만 이상하게도 가파도의 소라구이는 그 맛이 또 다르다. 소금 두껍게 깔고 뿔소라를 한 접시 가득 내주며 소박한 불 쇼까지 보여주는데, 이 섬의 뿔소라는 달고 부드러우며 쫄깃하고 향기롭다. 가파도에서만 구입할 수 있는 뿔소라 젓갈도 맛나다.

늦은 봄이 되면 성게비빔밥이나 성게손칼국수도 빼놓을 수 없다. 산뜻하면서도 끝 맛이 달고 향이 좋은 성게 알을 실하게 올리고 온갖 야채를 넣어 새콤한 초고추장에 비빈 성게비빔밥이나 뜨끈뜨끈하고 속 깊은 맛의 국물에 잘 반죽해 총총 썰어 넣고 팔팔 끓여낸 성게손칼국수는 도무지 누군가에게 양보할 수 없는 맛이다.

세계 최초로 탄소 제로 섬에 도전

가파도 대부분의 민박집이나 펜션에서 식당을 함께 운영하기 때문에 다양한 섬 아낙들의 손맛을 볼 수 있다. 하동포구의 해녀촌은 막걸리 한 잔에 소라구이 한 접시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기에 딱 좋은 곳이다. 가파도에 관한 기쁜 소식이 한 가지 더 있다. 언제까지나 푸른 청보리밭의 섬일 것 같은 가파도가 더 파랗게 변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탄소 제로에 도전하는 섬으로 다시 태어날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가파도 상동포구로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가파도 상동포구로 여행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식목일을 시작으로 2백60여 명의 가파도 주민과 공무원들이 힘을 합쳐 섬에 나무를 심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황근과 까마귀쪽나무 등 해풍에 강한 나무들이 해안선을 따라 하나 둘씩 심어지고 있다. 탄소 없는 푸른 섬으로 만들기 위해 가파도의 화력발전기는 모두 풍력 발전기로 대체될 예정이다. 섬 내의 1백30여 모든 가구에는 태양광 발전설비가 갖춰지고 주민들의 차량도 모두 전기차로 바뀐다.

여행자들은 지금까지 그랬듯 가파도를 찾을 땐 오로지 여유로운 마음만 가져가는 게 좋겠다. 아름다운 섬 제주가 품은 멋진 섬 가파도의 봄날이 더 반짝반짝 빛날 수 있도록 말이다.

글·고선영 (여행작가) / 사진·김형호 (사진작가)

r1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