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代 남자 10명 모두 현역 복무한 권성기씨 일가

3대에 걸쳐 남자 10명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한 가문이 있다.

경기 안양에 사는 권성기(80)씨는 6·25 전쟁이 발발하자 고등학생의 몸으로 전선에 뛰어들었다. 권씨의 세 아들과 손자 등 9명도 모두 육·해·공군에서 현역과 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이들은 명절 모임 등이 있을 때 만나면 군대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군대가 가족, 형제 간의 우애도 더 돈독하게 해준 것이다.



 

“평범한 가문일 뿐인데 주목을 받게 되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자녀들이 모두 무사히 국방의 의무를 다하게 된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아들부잣집’ 권씨 가문의 좌장 권성기(80)씨의 말이다. 권씨는 슬하에 3형제를 뒀다. 권씨의 3형제는 각각 아들을 두명씩 낳았다. 아들 셋과 손자 여섯을 둔 권씨 집안은 3대에 걸친 남자 10명(권씨 포함)이 모두 육·해·공군에서 현역과 장교로 군복무를 마쳤다. 병역기피가 만연한 요즘 보기 드문 ‘병역 명가’인 것이다.

권성기씨는 육군 작전장교로 6·25전쟁과 베트남전에 참가했다. 그의 첫째 아들 권순도씨는 포병 제101대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했으며, 둘째 아들 권순화씨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 화학지원대에서 제독병 및 행정병으로 근무했다. 막내아들 권순영씨는 중화기중대에서 기관총 사수로 군복무를 마쳤다.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이 가장 아쉬워”

큰손자 준일씨는 강원도 고성군 22사단에서 보병으로 근무했으며, 둘째 손자 준호씨는 52향토사단에서 복무했다. 셋째 손자 준학씨는 공군 특기병, 넷째 손자 준영씨는 9사단 29연대 수색대에서 근무했다. 다섯째 준열씨는 공군헌병으로 대통령 전용기를 경호했다. 여섯째 손자 권준성씨는 해군작전사령부 비로봉함 소속 조타병으로 근무했다.

권성기씨는 6·25전쟁을 직접 겪은 전쟁세대다. 그는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북한과의 전투는 정말 치열했다”고 회상했다.

권씨는 5월 31일 통화에서 “특히 1953년 7월 휴전을 앞두고 있었던 ‘7·13전투’가 유달리 그랬다”며 “수많은 전우가 제 앞에서 쓰러져가는 광경을 목격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많은 전우를 이름 없는 고지와 산골짜기에 묻어가며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끝내 통일의 열망을 이루지 못한 채 남북으로 분단된 현실이 가장 아쉽다”고 덧붙였다.

1953년 휴전이 되면서 진로를 놓고 고민하던 권성기씨는 직업군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1953년 육군보병학교에 입교해 포병소위로 임관된 그는 이후 줄곧 전방사단과 군단, 야전군의 작전 분야에서 장교로 근무했다. 1966년에는 베트남 전쟁에 지원해 백마부대 1진 선발대 요원으로 18개월 동안 전투에 참가했다.

1967년 2월 26일 백마1호작전 전공자 무공훈장 수여식 장면. 원 안에 있는 사람이 권성기씨다.
1967년 2월 26일 백마1호작전 전공자 무공훈장 수여식 장면. 원 안에 있는 사람이 권성기씨다.

큰손자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

그는 백마1호 작전에서 한국군 역사상 최초로 적진 중앙에 야포를 공수, 고지 정상에 포를 거치해 기선을 잡았다. 고지를 선점한 뒤 계곡으로 쳐들어오는 적군을 향해 돌진하는 보병부대를 지원한 것이 그였다. 권씨는 이 전투의 공로를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권성기씨는 1978년 전역한 뒤 1988년 88올림픽 때 자원봉사자로 참가하는 등 봉사활동을 해왔다. 큰손자 준일씨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군대에서 겪었던 일화를 들으면서 자랐다”며 “집안 어른들 모두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남자는 군대에 꼭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준일씨에게 할아버지는 ‘롤 모델’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엄한 할아버지가 무섭기도 했지만, 남자답고 당당한 할아버지를 본받고 싶기도 했다”고 말했다.

손자 권씨는 대학교 2학년을 마친 후 군대에 지원 입대해 최전방 GOP에서 현역으로 근무했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해 스스로에게 떳떳해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할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고 했다. 그랬던 준일씨에게도 군생활은 쉽지만은 않았다. 입대 전까지는 그저 자유로운 학생이었던 그로서는 규칙적인 생활패턴과 엄격한 생활규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대학교 입학 후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 사회생활 경험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도 없었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내무반 생활이 어색했습니다. 선임들과의 관계와 생활패턴 등 모든 것이 낯설더라고요.”

하지만 군생활에 차츰 적응하게 되자 부대생활은 그를 긍정적인 모습으로 변화하게 했다. 그는 군생활을 통해 나약하고 나태했던 심신을 다듬어갔고, 선후임 간의 신의도 돈독히 쌓을 수 있었다. “특히 최전방인 강원도 고성군에서의 근무 경험은 국가를 지킨다는 자긍심과 함께 끈끈한 전우애도 느낄 수 있게 해줬다”고 했다.

“명절 아니어도 할아버지 댁에 자주 모여”

“군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7개월간의 GOP 생활입니다. 북한과 바로 맞닿아 있는 지역 특성상 항상 긴장을 늦출 수 없었죠. 한여름의 땡볕이 야속하게만 느껴지더라고요. 하지만 선임이 앞에서 이끌어주고 후임이 뒤에서 받쳐줬기 때문에 무사히 경계근무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권성기씨 가문은 명절 모임 등이 있을 때면 군대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권준일씨는 “형제끼리 우애가 좋아서 가족 모임을 자주 갖는 편”이라며 “할아버지 댁에서 3대가 모두 모일 때면 군대 이야기는 빠뜨릴 수 없는 단골 소재”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군대를 다녀온 뒤에는 할아버지와의 사이가 더욱 가까워졌다”고 했다.

손자 준일씨는 “명절이나 할아버지 생신같이 특별한 날이 아닌 때에도 종종 할아버지 댁을 방문해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눈다”며 “군대가 가족, 형제 간의 우애도 더욱 돈독하게 해줬다”며 웃었다. 권씨 집안은 국방부로부터 ‘2012년 병역명문가’로 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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