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문재인 상임고문은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이다.

그는 경남고를 졸업하고 경희대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1975년에는 유신반대의 선봉에서 학내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돼 학교에서 제적됐고, 공수부대에 강제 징집됐다.

1980년 복학한 뒤 사법시험(22회)에 합격했지만 또다시 계엄령 위반 혐의로 구금됐고, 같은 해 6월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법시험 최종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는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법관 임용에서 탈락했고 부산에서 변호사를 시작했다.
그 때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사람이 노무현 당시 변호사였다.

이후 두 사람은 부산·경남 지역의 시국·노동사건 변론을 도맡아하며 동업자에서 동지적 관계로 발전했다.
문 고문은 특히 노 전 대통령의 취임 이후 노 전 대통령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2003년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 2004년 5월 시민사회수석, 2005년 다시 민정수석 비서관을 지냈고, 청와대를 잠시 떠나있을 때에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 변호인단 간사로 활동했다.

2006년 10월에는 대통령 정무특보로 임명됐고, 2007년 참여정부에 대한 여론이 최고조로 악화됐을 때에도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노 전 대통령을 지켰다.

그러나 문 고문은 번번이 '코드인사' 대상으로 지목이 됐고, 2006년 8월에는 법무부 장관 후보로 거론됐으나 여당의 반대로 봉쇄됐다.

문 고문은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에서 부산 출마 요구를 받았으나 "정치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다"며 민정수석 자리에서 사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노풍(노무현 바람)이 강하게 불자 `문재인 카드'가 급부상했고, 같은 해 10월 경남 양산 재보선 국회의원 후보, 2010년 6ㆍ2 지방선거 부산시장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다.

2011년 6월 자서전 '운명' 출간 이후에는 야권의 유력 대선주자로 이름을 올렸다.

특히 야권 대선주자들의 지지율이 제자리를 맴돌면서 문 고문의 등판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졌고, 결국 정권교체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야권대통합에 참여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최근 '이해찬-박지원 역할분담론'에 대한 지지발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공동정부론 등으로 당 안팎의 비판을 받았고, 한 때 25%대까지 치솟았던 지지율은 10%대 초반으로 떨어졌다.

▲경남 거제(59) ▲경희대 법대 ▲사법시험 합격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ㆍ경남 변호사 모임 대표 ▲청와대 민정수석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청와대 비서실장 ▲노무현재단 이사장 ▲혁신과통합 상임공동대표 ▲19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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