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평택 제2함대서 기념식…유가족 등 3500여 명 참석

오늘 우리가 누리는 행복과 자유는 누군가의 희생의 대가이다.
2002년 6월 29일, 온 국민이 월드컵 4강 신화의 감격에 들떠 있던 그 시각.
우리의 서해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6명의 우리 해군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산화한 거룩한 6용사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전 국민의 안보의지와 굳건한 국방태세를 다짐하는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지난 6월 14일 제2연평해전 10주기를 보름 앞두고 한국 최초의 스텔스 구축함 문무대왕함에 탑승한 유가족들이 해상헌화를 하고 있다.
지난 6월 14일 제2연평해전 10주기를 보름 앞두고 한국 최초의 스텔스 구축함 문무대왕함에 탑승한 유가족들이 해상헌화를 하고 있다.

고 윤영하 소령, 한상국·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2002년 6월 29일, 한일 월드컵 폐막을 하루 앞두고 온 국민이 4강 신화에 들떠 있을 때 이들 6용사는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 전사했다.

이들의 넋을 기리는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식’이 6월 29일 오전 10시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 서해수호관 광장에서 거행된다.

‘하나 된 국민 최강의 안보’라는 주제로 열리는 제2연평해전 10주년 기념식은 10년 전 서해 연평도 해상에서 작전 임무 수행 중 고귀한 생명을 조국에 바친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북한의 기습적인 도발을 단호히 응징하고 퇴각시킨 해군의 승전을 기념,

전 국민의 안보의지와 굳건한 국방태세를 다짐하는 행사로 거행된다.

치열했던 30분간의 전투로 NLL 지켜

이날 기념식은 전사자 유가족과 승조원, 정부 주요인사, 각계 대표, 시민, 학생 등 3천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헌화·분향, 기념영상물 상영, 기념사, 기념공연의 순서로 진행된다.

또한 제2연평해전 여섯 영웅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사이버추모관을 개설, 운영(webzine.mpva.go.kr/mpva)하며, 전사자 출신학교별 추모식, 제2 연평해전 특별안보사진전 등을 개최하여 국민이 제2연평해전과 우리의 안보 현실을 바로 알 수 있도록 했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경 북한의 경비정 2척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하면서 시작됐다.

북한 경비정이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NLL 남쪽 3마일 해상까지 남하하자 우리 해군의 고속정 4척은 즉각 대응태세에 들어갔다.

하지만 북한경비정이 갑자기 선제 기습포격을 가해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제2연평해전 8주년인 2010년 6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참수리호 모형을 관람하고 있다.
제2연평해전 8주년인 2010년 6월 29일 오전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은 어린이들이 참수리호 모형을 관람하고 있다.

약 30분간 지속된 교전으로 북한 경비정을 격퇴하고 NLL을 지켰지만, 우리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당했다.

북한도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경비정이 화염에 휩싸인 채 도주하였다.

당시 전사한 윤영하 소령의 뒤를 이어 함교를 지휘한 이희완 대위는 훗날 제2연평해전 당시 전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쓰러진 동료를 대신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적의 포탄이 참수리 357호에 명중하여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도 승조원들은 즉각 반격에 나섰습니다.

적의 포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함교에서 태산같이 버티며 반격을 지휘하던 정장 고 윤영하 소령이 전사하자,

부장인 저는 왼쪽 다리뼈가 포탄 파편에 맞아 으스러지고 오른쪽 다리는 파편이 관통하는 중상을 입은 상태로 승조원들을 지휘하여 북한 경비정에 대응하였습니다.

포대 안에서 적을 향해 응사하던 21포 사수 고 조천형 중사와 22포 사수 고 황도현 중사는 포대가 적의 포탄에 명중되어 화염에 쌓인 극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응사하다 장렬히 산화하였으며, M-60 기관총 사수였던 고 서후원 중사도 마지막 순간까지 방아쇠를 놓지 않았습니다.

의무병 고 박동혁 병장은 빗발치는 포탄 속에서 적 탄환에 오른팔이 관통된 상황에서도 쓰러진 동료를 대신하여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기관실에 지름 20센티미터의 구멍이 뚫린 참수리 357호는 우리측 해군 고속정에 의해 예인되던 중 가라앉았다.

당시 시신을 찾을 수 없었던 조타장 고 한상국 중사는 침몰 41일 만에 인양된 참수리 357호 안에서 타기(배의 방향을 조절하는 키)를 놓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전투 중 상처를 입어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되었던 의무병 박동혁 병장은 교전 후 8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2011년 6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제2연평해전 9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이 고인의 영정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2011년 6월 25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제2연평해전 9주기 추모식에서 유가족들이 고인의 영정사진을 어루만지고 있다.

이희완 대위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윤영하 정장님은 마지막 순간에 ‘엎드려’라는 명령을 내린 후 전사하였다”며 “정장님의 마지막 표정이 너무나 담담하였고,

그 표정을 보고 나도 위기의 순간에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 대위는 또한 “제2연평해전은 불의의 기습공격으로 고 윤영하 소령 등 6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지만,

우리의 조국과 바다를 지키겠다는 확고한 전투의지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NLL을 사수한 승리한 해전이었다”고 평가했다.

2008년 4월 정부는 ‘제2서해교전’ 등으로 불리던 이 전투를 ‘제2 연평해전’으로 명칭을 바꾸고, 그동안 추모식 성격이었던 행사를 정부 주관 승전기념식으로 격상시켰다.

제2연평해전의 참전자와 유가족은 “해마다 6월이 되면 호국보훈의 달이라고 하지만 실제 제2연평해전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우리나라가 어떤 안보 상황 속에 있고, 또 그 속에서 군인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았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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