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북쪽에서 내려와서 반도 남쪽에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지난 주말, 백두산이 백두대간을 이끌고 내려오다가 남해 바다를 바라보면서 잠시 숨을 고르는 광양 백운산(白雲山)을 찾았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도(三道)에 걸쳐있는 지리산을 빼면, 전남에서 제일 높은 해발 1210m 산이다.

피톤치드(phytoncide)를 많이 내품어서 요사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편백(扁柏)나무 숲 속의 포스코(posco) 연수원에서의 가을밤은 공기부터 맑고 상쾌했다. 편백나무 등 식물이 병원균· 해충· 곰팡이에 저항하려고 내품거나 분비하는 물질로 삼림욕을 통해 각종 항균성 물질을 이루는 피톤치드를 마시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며 살균작용도 이루어진다.

재단법인 아시아경제협력재단 임양택 이사장 일행을 환영하는 만찬이 이성웅 광양시장 주관으로 끝나고, 남도 판소리 한 마당이 펼쳐졌다. 특별한 무대도 없고, 출연자는 심봉사 역과 심청을 낳고 일주일 만에 죽은 심봉사 부인 역을 하는 남녀 두 사람이었다. 고흥에서 활동하고 있는 흥양예술단 정준찬 단장과 단원이었다.

배꼽 밑 세 치에 있는 단전(丹田)에서 나오는 판소리는 금세 소리꾼과 관객이 하나가 되었고, 심청전 한 대목 판소리가 끝날 무렵에는 관객도 소리꾼도 함께 눈물 적시는 감동의 물결이 휩쓸었다. 노래이건, 문학이건, 영화이건, 예술은 형식과 처지와 차이를 뛰어 넘고, 시간과 공간을 융합하면서 순식간에 인간에게 감동을 준다. 인간의 영혼을 깨끗이 정화하고 세탁해 준다. 새로운 눈뜸(開眼)이요, 거듭 태어남(復活)이다. 꼭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세계적으로 유명해야 만이 남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고난을 겪고 슬픔을 이겨낸 인간이 그것을 소리로, 글로, 몸짓으로 나타냈을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빠져 들고 몸을 떠는 전율(戰慄)을 느낀다.

한(恨)의 예술 판소리는‘진도아리랑’에서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의 아름다운 변주를 보여 주었다. 이어서 동행한 세계적인 소프라노 이점자씨의‘보리밭’과‘목포의 눈물’은 끊어질듯 이어지는 그리움과 외로움, 정한(情恨)의 깊은 미학을 맛보게 했다. 소리에는 듣는 사람에게 울림을 주는 뜻이 있고 힘이 있고 빛이 있다.


이튿날, 바다를 메우고 작은 섬들을 연결한 460만평 부지 위에서 하루에 철강 5만 톤을 생산해 내는 세계 최대 제철소인 광양제철소를 견학했다. 검고 거친 철광석을 1,500도의 불덩어리 쇳물로 만들어서 물로 식히고 씻어내서 윤기 나는 철판으로 감아내는 마술 같은 공정을 보았다. 중국에 추월당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광양만을 포함하여 순천 여수 등 광양만권의 장기적인 발전과 비젼을 연구하고 있는 (재)광양만권 U-IT연구소를 방문하여 조병록 소장(순천대 정보통신공학과 교수)의 연구와 기술과 경영이 접합된 생생한 브리핑을 청취한 것도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의 큰 소득이었다.

왼쪽 여수반도와 오른쪽 고흥반도 사이에서 오랜 세월 잊혀지고 버려졌던 70만평 갯벌이 이제 세계 5대 연안습지가 되어 1년에 2백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순천만(順天灣)을 둘러보았다. 지금껏 별로 쓸 데 없다고 생각되던 30만평 갈대숲은 이제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황금빛 손짓이 되었다. 멸종 위기의 희귀종으로 천연기념물 228호 흑두루미가 늦가을 찾아와서 겨울 한 철을 나는 철새들의 서식지로도 세계에 알려졌다. 양복완(楊卜完 ) 순천시 부시장이 초대해준 점심은 남도지방의 음식을 알 수 있는 즐거운 자리였다.

예향 남도가 고향이고, 광양과 순천을 몇 차례 찾아 왔지만, 이번처럼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적은 없었다. 광양과 순천의 풍광도 좋고, 인심과 음식 맛도 잊을 수 없었다. 문화 해설사들의 깊이 있고 친절한 설명도 좋았다. 이번 남도 여행은 참으로 즐겁고 뜻 깊은 시간이었다. 만나고 이야기하고 환대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

김윤호 논설위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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