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값이 다시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지만, 유가(油價)를 잡겠다던 정부의 대책은 '백약(百藥)이 무효'일 정도로 힘을 잃고 있다.

전국 주유소 보통휘발유 평균가격은 22일 오후 L(리터)당 1995.33원을 나타내며 2000원대 재진입에 임박했다.

지난달 16일 L당 1891.86원으로 바닥을 찍은 뒤 37일 연속 오름세다.

지난 4월 18일 사상 최고가인 L당 2062.55원을 기록한 후 완연했던 하락세는 이제 옛이야기가 됐다.

정부 유가 대책, 백약이 무효

국내 기름값이 지난 2월 말 수준으로 되돌아가면서 정부가 그동안 내놓은 갖가지 대책들은 소용없는 일이었다는 지적이다.

휘발유, 경유 등의 가격이 사상 최고치로 치솟자 지난 4월 정부는 알뜰주유소 확대와 석유 전자상거래 활성화, 혼합판매 허용 등의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자영 알뜰주유소는 서울 7개, 부산 8개가 문을 여는 데 그치는 등 도심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가격조차 싸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제5정유사로 불렸던 삼성토탈은 공급 물량이 적어 영향이 미미하다"라며 "석유 전자상거래 거래 물량이 대부분 경유에 몰려 있는 점도 유가 잡기가 한계를 보이는 이유"라고 말했다.

전자상거래와 관련해선 당근으로 내놨던 세금 혜택 등도 일본 정유사에 돌아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는 수입 석유에 3%의 기본관세를 면제하고 L당 16원의 수입부과금을 환급해주는 등 L당 50원가량의 혜택을 주며 가격 인하 효과를 기대했지만,

정작 가격을 끌어내리지는 못하고 국내에 기름을 수출하는 일본 정유사들에 그 혜택이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달부터 시행한다던 석유 혼합판매도 마무리 협상이 늦어지며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제 가격과 세금이 기름값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90%를 넘는 상황에서, 다른 분야에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는 가격을 낮추기에 역부족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덕환 서강대(화학과) 교수는 "경기가 불안한 가운데 국제 유가가 예측하기 어려운 급등락을 이어가는 상황에서는 우리 정부가 아무 대안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말했다.



국제 유가 오름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내 기름값은 상승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의 주유 습관도 바뀌고 있다.

에너지 기업에 다니는 이모 부장(43)은 최근 주유소가 눈에 보일 때마다 6만~7만원씩 주유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계기판 바늘이 바닥에 닿으면 절반 정도 채웠던 것과 완연히 달라진 것.

서울지역 휘발유 가격이 다시 리터(L)당 2000원을 넘어선 지 한 달 가까이 됐지만, 앞으로 최소한 몇 주는 더 오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에너지 업계 관계자는 "금액 대신 리터로 주유하거나 1만~2만원씩 소액으로 기름을 넣는 소비자 등 다양한 주유 습관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美 경기 호전과 투기자금이 국제 유가 올려

국내 가격에 영향을 끼치는 국제 유가는 가파르게 오르던 2월 초 수준을 회복했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이달석 에너지정책연구본부장은 "6, 7월 소비자구매지수 등 미국의 경기지표가 좋게 나오고, 최근 들어 미국 증시가 큰 폭으로 오르면서 국제 유가도 영향을 받고 있다"며

"지난달 전 세계적으로 일일 원유 공급이 수요보다 190만 배럴 더 많았던 것으로 집계되는 등 공급 과잉이 이어지는 가운데 예상 밖의 결과"라고 말했다.

2분기 들어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며 국제 유가를 안정세로 이끌었던 이란 등 중동 지역 정세도 다시 긴장감이 높아지면서 유가를 끌어올리고 있다.

이 본부장은 "이란 핵협상이 시작되면서 유가가 내리자 빠졌던 투기자금들이 다시 유입되고 있는 것도 유가를 상승시키는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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