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다른 주장에 밀려 일반의약품 전환 취소

사후피임약과 사전피임약의 의약품 분류를 수정하려던 보건당국이 관련 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전환계획을 전면 취소하자 무책임한 결정이라는 비난이 잇따르고 있다.
당초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지난 6월 발표한 의약품 재분류안에 따라 기존에 의사 처방이 필요했던 사후피임약은 원치않는 임신이 우려될 때 긴급하게 복용할 수 있도록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할 계획이었다.

또 대부분 일반의약품으로 약국에서 판매하던 사전피임약은 부작용 위험이 높다는 국내외 보고에 따라 전부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재분류안에 대해 여성계·의료계·약사계·종교계 등이 제각기 다른 주장을 펴며 반대하자 부담을 느낀 보건당국이 아예 전환계획을 포기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사후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사전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기존 분류를 유지하게 됐다.

그 배경에 대해 김원종 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은 "이번에 전체 의약품을 재분류하면서 적용한 프로토콜에 따르면 사전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사후피임약은 일반의약품으로 분류하는 게 맞지만 피임약은 의·과학적 논리만으로 분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사전피임약이 국내 도입된 이후 수십 년간 약국에서 판매했음에도 복용률이 극히 낮은 상황에서 전문의약품으로 전환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설명이다.

또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기에는 아직 우리나라의 성문화가 성숙하지 않았고 관련 제도가 미비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대한약사회 측은 "이번 의약품 재분류를 통해 의약분업 이후 미미했던 제도적 큰 틀을 마련했다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나 안전성과 유효성이 확인된 사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키로 한 것은 실망스럽다"고 밝혔다.

김두나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또한 "여성의 접근 편의를 고려해 사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유지하기로 한 것은 바람직하다"면서도

사후피임약에 대해서는 "기존처럼 의사처방이 필요하면 정작 필요한 응급상황에 쓰기 어려워,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지 못한 처사"라고 말했다.

반면 최안나 진정으로산부인과를걱정하는의사들모임(GYNOB) 대변인은 "오남용 우려가 있는 사후피임약의 전문의약품 유지는 옳으나,

사전피임약은 보건당국이 재분류안을 제시하며 인정했던 것처럼 부작용 위험이 높은데 일반의약품으로 유지하는 건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보건당국의 이번 정책결정 과정 자체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았다. 충분한 검토 없이 피임약의 재분류안을 제시해 정책 혼선만 빚었다는 질책이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팀장은 "접근성과 응급성 등 정작 중요한 문제는 해결하지 않고 종교윤리와 국민인식을 명분으로 사후피임약을 전문의약품으로 유지하기로 한 것은 무책임하다"며 "원래대로 되돌릴 것이면 그동안 각 단체가 무엇을 위해 치열하게 논의해왔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최안나 대변인도 "사후피임약을 일반의약품으로 전환하는 게 어려워지자 각 단체의 주장을 주거니 받거니 들어주는 식으로 사전피임약은 전문의약품으로 두는 것이 아니냐"며 "국민건강을 생각해야 할 보건당국이 상황이 복잡해지니 정치적인 판단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재호 대한의사협회 의무이사는 "과학적, 학술적 근거를 토대로 재분류하겠다던 식약청이 사회적 판단과 외부의견에 밀려 피임약 재분류를 3년간 유예키로 한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보건당국은 피임약 재분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고려, 현행을 유지하지만 앞으로 3년간 부작용을 모니터링해 의·과학적 데이터를 쌓고 재분류 검토를 다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기원 식약청 의약품안전국장은 "이번 의약품 재분류안을 계기로 우리사회에서 피임약과 성문화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는데 의의가 있다"며 "그동안 제시된 사회의견을 반영해 관계부처 및 유관단체와 보완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답했다.

산부인과학회 및 개원의협의회 측은 "정부가 피임약 복용시 전문진료를 권유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기로 한 발표를 환영한다"며 "올바른 피임문화와 계획출산이 정착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현철 낙태반대운동연합 회장은 "보건당국은 앞으로 국내 여성의 피임약 실태를 조사하고, 사후피임약과 사전피임약을 각각 언제, 어떻게 사용할지 홍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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