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세상이 와글와글 시끄러워지는 세상의 문제 인물입니다. 돈도 명예도 탐하지 않고 오직 평화만을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뿐인데 세상은 내 이름자 앞에 수많은 별명을 덧붙이고 거부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3일 새벽 별세한 문선명 통일교 총재는 2009년 구순(九旬)을 앞두고 펴낸 회고록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에서 자신의 삶을 이같이 고백했다.

1920년 1월6일 평북 정주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일본 와세다대 전기학과를 졸업하고 6·25 전쟁 휴전 다음해인 1954년 통일교를 창시했다.

문 총재는 열여섯 살 때 부활절 날 기도하던 중 예수에게서 사명과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1954년 5월1일 서울 성동구 북학동 한 가정집에서 창립한 신흥 종교 통일교는 불과 50여 년 만에서 전 세계 194개국 300여만 신도를 거느린 종교 단체로 성장했다.

1958년 일본을 시작으로 해외 선교의 닻을 올렸으며 1970년대 초반 미국에 건너가 선교 사업을 진두지휘하는 등 해외 선교를 본격화했다.

'순결한 가정'을 기치로 1961년 36쌍을 시작으로 합동결혼식을 치렀으며 1992년 8월 서울 잠실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열린 3만쌍 국제 합동결혼식은 전 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됐다.

하지만 통일교의 성장과정은 문 총재가 회고록에서 밝힌 것처럼 순탄치 않았다.

문 총재는 일제식민기와 광복 후 공산 치하 북한, 이승만 정권 시절, 그리고 미국 등지에서 모두 6차례나 옥고를 치렀다.

2008년 7월에는 헬기 불시착 사고로 아찔한 순간을 맞기도 했다.

통일교 역시 문 총재를 메시아로 보는 교리 때문에 이단 시비에 휘말리곤 했다.

통일교는 1997년 창립 43년 만에 지금까지 사용하던 정식 명칭인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으로 바꾸는 등 변신을 시도하기도 했다.

문 총재는 이단 시비와 각종 논란에도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고도의 사업 수완을 발휘,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사업을 벌여왔다.

통일교가 보유한 사업체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다.

일화, 용평리조트를 비롯해 국내에만 10여 개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일보, 미국 워싱턴타임스, UPI 통신, 리틀엔젤스 예술단, 유니버설 발레단 등 언론 문화 예술 단체도 소유하고 있다.

선문대, 선화예술중고교, 미국 브리지포트대 등 교육기관도 운영한다.

회고록에서 "평화 세계를 이루기 위해 나는 평생 세상의 낮고 구석진 곳을 찾아다녔다"고 밝힌 문 총재는 1970년대부터 세계 평화 운동에 매진했다.

2005년 천주평화연합을 창립한 데 이어 2010년에는 유엔을 대체할 평화 기구로 '부모 유엔'을 창설했다.

1990년에는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나 세계 평화 등을 논의했다.

문 총재는 회고록에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면담한 자리에서 한국과 수교할 것을 촉구했다고 언급, 곧이어 성사된 한국과 러시아의 수교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9·11 테러가 발생하자 전 세계 종교 지도자를 초청해 예루살렘에서 평화대행진을 수차례 벌였다.

2003년부터는 세계 클럽 축구 대회인 '피스컵'을 열었다.

북한과도 인연이 깊다.

1987년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을 창립했으며 1991년 북한을 처음 방문, 당시 북한에 생존한 여동생을 상봉하고, 흥남까지 헬기를 타고 가 '마전 주석공관'에서 김일성 주석과 환담했다.

문 총재는 당시 김 주석과 금강산 개발투자에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통일교 계열로 알려진 평화자동차는 2002년 북한 남포에 자동차공장 준공식을 하고 자동차 생산에 돌입했다.

문 총재는 작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북한에 조화를 보냈다.

문 총재는 40세 되던 1960년 23세 연하의 한학자 씨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7남6녀를 두고 있다.

1983년에는 둘째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