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2명의 조언…“남의 도움 안 받겠다는 자만 버리니 길 열려”

제대군인으로 취업과 창업에 성공한 이들의 공통점은 철저한 준비성과 부단한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반면 전역 이후에도 군인으로 있을 당시 생활방식과 막연한 자신감에 휩싸여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적지 않다.

국가보훈처가 지난 10월 10일 시상한 취·창업 성공수기에는 이러한 제대군인들의 고충과 성공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최우수상을 수상한 최석경씨와 우수상을 받은 이신호씨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2008년 9월 중령 진급 3차 발표가 나던 날. 모든 것을 걸고서 20년 가까이 복무해왔는데 결과는 탈락이었다. 오로지 군 생활 한길로만 매진해왔는데 진급 명단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군 생활 처음부터의 과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진급에서 떨어진 후 3년이 흐른 지금, 나는 문화재청 비상계획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21년 군 복무 후 사회에 진출해 공무원이 된지 1년. 사회 초년생이지만 직장생활에 만족하고 있고 인생 2막을 새롭게 쓰고 있다. 하지만 불과 1~2년 전만 해도 불확실한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현재 나의 모습은 3년 전부터 내가 생활해온 결과이며, 지금 내가 어떻게 하느냐가 3년 후 나의 모습을 결정한다.” 전역 예정일까지 3년 정도 남아 있던 시점에 내 인생을 새롭게 설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전역 시 내가 바라는 취업의 목표 및 최종상태를 우선적으로 설정했다.

나는 “①비상계획관 ②군무원 ③예비군 중대장 ④학군단 교관 ⑤ 연봉 4천만원 이상 직장 순으로 우선순위가 높은 것을 꼭 이룬다”고 결심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우선 관련 정보가 필요했다. 정보를 파악하기 위하여 전역한 선배, 동료들은 물론 각종 인터넷의 취업정보 사이트를 방문했다.

적극성은 성패를 가름할 정도로 중요한 요소다. 시험준비 과정에서 군과 사회조직의 차이점이 크다는 것을 느꼈다. 군은 적극적으로 서비스해주는 경향이 많은 반면 사회는 홈페이지, 공고, 게시 등을 통하여 전달하는 것이 전부다. 전자의 시스템에 길들여진 군인들이 사회에 진출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서 취업을 준비하는 군인은 자신이 직접 해야 하는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함을 선배로서 재차 강조하고 싶다. 목표를 선정했으면 이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이것은 3년을 내다보며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3년이면 하루 10시간씩 1만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1만시간 이상 집중해 노력하면 그 성과를 볼 수 있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계획을 수립해 실천하다보면 처음에 진행이 잘되는 듯하나 시간이 지나면 몸과 마음이 지친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여기서 좌절하고 꿈을 포기한다. 이러한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일매일 목표를 정하고 달성도를 체크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해야 한다. 또한 1막에서처럼 또 좌절할 수는 없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나는 지금도 전역을 앞둔 막막했던 그 순간을 되새기곤 한다. 무엇보다도 사회진출에 대한 나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었고,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계별, 월별, 일일 단위로 목표설정과 이를 확인해나갔기 때문이다. 전역을 앞둔 분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말은 비록 군 생활에 매진하느라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자신의 목표달성을 위해서 1만 시간 노력할 각오로 임한다면 반드시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는 육군 대위로 전역한 지 1년 6개월 만에 취업에 성공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내야 한다는 강한 정신력과 판단력이 있다면 전역 후 사업이든 취업이든 성공할 수 있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제대군인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리면 취업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처음에는 퇴직금과 군인공제회 적금으로 ‘사업을 하자’고 마음 먹었다. 2~3년 고생하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빠 우리 집은 어디에 있어?”라는 세 살짜리 딸아이 말을 듣고 급하게 아파트 전세를 구하고 나니, 1년 안에 취업하지 않으면 생활고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내는 둘째를 임신한 상태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내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눈만 높았던 점이다. 장교 출신은 사회에서 인정해줄 것이고, 경력도 인정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허황된 시간을 보냈다.

생활비가 바닥을 드러낼 시점에 생활고와 나의 현실이 눈앞에 보였다. ‘막노동을 하거나 공장일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절실해졌다. 그때 나에게 손을 내민 곳이 바로 제대군인지원센터였다.

기업협력팀 이종서 팀장에게 “이제 정말 기업에 취업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지금 지원센터에 오셔서 바로 취업이 될 수 있도록 합시다”라는 답변을 해주었다. 한걸음에 달려가 상담을 받았다.

절박한 상황에 놓이자,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도움의 손길이 보였다. “나는 사회 현실을 다 알고 있고, 누구의 도움 없이 전역 후 나의 능력으로 취업이든 사업이든 할 수 있다”는 막연한 자신감이 제대군인지원센터의 손길을 외면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아이아라는 기업을 소개받았다. “지원접수 기간입니다. 자동차 부품 회사로 연매출액이 2천억원이 넘고 직원수 3백명이 넘는 대기업입니다.” 1차 면접 합격 후 적극적으로 나의 상황을 알리고, 향후 진로에 대해 제대군인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센터가 언제나 함께한다고 생각하니 든든했다. 나는 2차 면접에서 강한 정신력과 공동체 생활의 장점을 내세우며 기본적 소양을 밝혔고 사장단의 눈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최종 합격을 하고 바로 이종서 팀장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지만 인생의 가장 어려운 난관에 봉착했을 때 함께 해준 제대군인지원센터에 무슨 말로 감사의 인사를 해도 모자랄 지경이다. 경기도 시흥에 살고 있는 나는 입사한 지 1년 6개월이 지난 현재 서울 양재동에 있는 현대·기아 자동차 본사를 오가며 구매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다양한 회사와 협상하며 조금씩 전문기술을 쌓고 있다. 회사사람들은 나에게 ‘군바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처음에는 듣기 거북했지만, 군 출신으로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업무에 임하며 이제는 웃어 넘길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됐다.

[글·사진:위클리공감]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