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목표는 단지 하나입니다. 위기의 조국을 구하는 것입니다.”(I’m in to save my country)

5년 전 미국 Harvard 대학에서 열린 초청 강연에서 연단에 올라선 박근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당시의 연설문에서 언급했던 ‘한·미 FTA 체결’ 문제와 ‘당의 소중한 보배’라고 소개했던 Harvard 졸업생 Kennedy School of Government 3명(박진, 권영세, 박재완)이 현역 의원이 아닌 것과 당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바뀌고 당명과 색깔이 바뀐 사실을 제외하고는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여전히 조국은 위기 국면이다. 국회는 자격시비로, 방송은 파업으로, 연령별·계층별·직업별·지역별로 생각이 다른 집단들에 의해 국론은 아침저녁으로 난도질당하고 있다. 진보란 이름으로 폭력이 용인되고 나약한 보수가 눈치를 보는 나라. 각자의 지분만큼 시대정신을 좀먹는 분열의 시대다. 누군가가 새 기풍으로 나라정신을 일으켜 세워야만 할 때가 왔다.

박근혜에게 지난 8년은 30~40대의 노출되지 않은 세월보다 더한 인내를 요구했다. 그녀는 당 간판을 뽑아 들고 한강변 천막생활을 자청했으며, 치명적인 테러에서도 살아남았다. 당명과 색깔을 바꾸면서까지 고사 직전의 당을 재건해 냈다. 하지만 총선에서 살려놓은 당에 대선 시즌만 되면 은밀하게 배신을 꿈꾸며 흠집을 찾는 짝짓기 그룹이 기생한다는 것을 염두해야 한다.

믿었던 당의 경선에서 패했던 2007년과 현재 비당권파가 집요하게 요구하는 2012년의 경선규정 시비가 몹시 닮아있다. 성문 밖에는 나오기만 기다리는 출신 성분이 다른 혼성부대의 포위망이 또 다시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제 아버지의 이름으로 활로를 열고 어머니의 향수로 원군을 도모해야 하는 고독한 전투가 시작되려 한다.

이제 여성이 나설 수밖에 없다

이 책 ‘女風당당 박근혜’ 저자 김대우, 김구칠 공저는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격언을 실천하고 있다. 선거시즌마다 쏟아지는 의미 없는 ‘박근혜 관찰기’와는 전혀 다른 맥락으로 읽힌다. 이 책은 박근혜와 일견 무관해보이지만 긴밀한 선으로 이어지는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담아내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박근혜의 현주소를 넓은 시야로 포착하고 있어 그 의미가 깊다.

최근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던 강용민의 저격, 나꼼수 열풍, 안철수의 행보, 진중권의 끝없는 싸움, 문성근의 전략, 박원순과 나경원의 네거티브 선거 등 근래 대한민국 정치계를 수놓았던 모든 움직임의 궤적을 따라가다보면 박근혜의 현주소를 타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제 아무리 뚫어져라 쳐다봐도 시야가 좁다면 판도는 읽을 수 없다. 미래를 읽고 싶다면 이제 박근혜라는 숲을 바라봐야 한다. 지속적인 여권신장과 의식의 개선으로 날로 강해져가는 여성유권자들의 힘이 뒷받침 되는 가운데 핍박의 세월을 딛고 준비된 여성 대통령으로 여풍당당하게 한 걸음 한 걸음 행보를 옮기고 있는 박근혜. 과연 어떤 흐름이 그녀를 대선 승리의 궤도를 만들었고 또 어떤 흐름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는지 도서출판 행복에너지(대표 권선복)에서 발간한 ‘여풍당당 박근혜’ 책과 함께 준비된 민생정부 여성 대통령으로 약속을 지키는 국민 대통합 대통령으로 행보하는 동북아 최초 여성대통령인 박근혜 당선자의 행보를 성원하여 당당한 대한민국 여성대통령으로 우뚝 서기를 기대하여 보자 .

본문 미리보기,“선거에 떨어지면 ×도 아니다”

일본 중의원 의장을 지낸 거물 오노 반보쿠(大野伴睦)란 자는 “원숭이는 나무에서 떨어져도 원숭이지만, 국회의원은 선거에 떨어지면 ×도 아니다.”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겼다.(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당시 자민당 부총재로 온 경축특사. 1962년 서울에서 박 대통령과 두 차례 회담했던 친한파) 강용석이 재선에 올인 했던 사연 역시 현역 국회의원이란 신분의 가치를 절감해서다.

그는 낙선했으나 여러 방송사로부터 끼를 인정받아서 러브콜을 받는 존재가 되었다. ‘고소·고발전문가’답게 TV조선의 소비자고발 프로 진행자로서 제2의 인생에 도전하고 있다.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는 게 저격수의 기본이다. 은신과 위장에 먼저 신경 쓰고 그 다음이 저격이지만 강용석은 반대로 접근했다. 자신을 100% 노출시킨 채 저격 대상을 먼저 지목하고 사전에 경고까지 하는 친절을 보인다.

박근혜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그 자체로 브랜드다. 그건 약속과 원칙을 중시하는 그녀의 토양이다. 하지만 박지원은 그 토양이 썩었다고 수시로 입소문을 내고 다니기에, 참다못해 사법적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박태규란 인물을 만났다면 당연히 연결한 사람이 나오고, 만나게 된 계기와 배석한 인물이 등장하며 오고간 얘기들이 거론될 수 밖에 없다. 그 만난 시점 또한 내용보다 중요할 수 있다. 그러니 단순한 ‘흠집 내기’ 차원이 아니라 두 사람 중 한 명의 정치생명이 걸린 단판승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박지원 자신이 직접 나서서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가 뭘까? 박근혜 입장에선 물증과 녹취록이 있다는 박지원의 주장을 계속 방치할 경우, 본의 아니게 주장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니 고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쩌면 박지원이 노린 목적은 따로 있을지 모른다. 큰 혐의를 벗기 위해서 알리바이 입증이 불가피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소한 일정을 노출시켜야만 하는 딜레마를 말이다.

게다가 기자간담회를 통해 ‘박근혜 3불不론’을 거론하며, 그의 폭로가 결코 1회성이 아닌 계산된 수순의 대선 전략임을 흘렸다. “오직 한 사람만 공격할 것이고, 모든 비난은 내가 감수하겠다.”는 불퇴전의 각오는 언론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타고난 입이기 때문이다. 두 번에 걸친 대선에서 농간과 의혹만으로도 완승을 했던 승자의 추억을 갖고 있기에.

그는 2011년 대구매일신문과 부산국제신문 초청행사에서 박근혜가 대통령 후보로 안 된다는 이유를, “박정희 유신독재의 공동책임자로 육영수 여사 피격 이후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한 장본인이고 이명박 정부 실정과 부패의 공동책임자”이기 때문이라고 덮어씌운 적이 있었다. 우선 의혹투성이의 인물 하나를 미끼삼아 여당 막사 앞에 던져놓는 것만으로도 진보당의 체력을 회복시켜줄 충분한 시간을 벌었다는 계산이다.

27살 처녀를 부산의 격전지에 전략공천 했던 새누리당. 여고 학생회장 출신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홍보회사에 다닌 게 전부인 손수조는 절대 반전될 수 없는 바둑판에 던져졌던 돌 하나에 불과했다. 행여 거물급 인사를 공천했다가 문재인에 패할 경우, 박근혜가 입을 정치적 타격을 우려해 밑져야 본전인 카드를 선택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그보다는 대선에 앞서 총선에서 20~30대가 움직이는 반응을 미리 떠보자는 계산이 아니었을까. 그 연령대에서 당보다 박근혜를 보고 찍는 표의 객관적인 데이터가 필요했다고 본다. 같은 연령의 이준석을 중앙당의 비대위원에 포진시켜 그의 입바른 언급을 통해 전국적 차원에서 20대의 반응을 살폈고, 손수조는 변방으로 보내서 자생력을 시험해본 성공한 케이스였다. 문재인의 동선을 제약시킨 것은 부수적인 효과다.

논객으로서 진중권과 유시민은 여러 면에서 닮았다. 수시로 여론에 편승하는 논쟁과정에 다소 욕을 먹으면서 골수 지지자들을 늘려온 점. 그들이 초창기에 대중적인 명성을 얻었던 창구가 기고와 TV출연이란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진중권은 먹잇감이 보이면 구체적이고 집요하게 시비를 걸고 뒤끝을 남긴다. 상대를 무시하는 듯한 언행으로 도발을 유도하며 현학적인 언어를 동원하고 무책임하다.

반면 유시민은 가끔 야비해 보이는 직설적인 표현을 쓰지만 나름 공적 책임감을 갖고 있다. 그가 20대에 구금되어 법정에 제출했던 ‘항소이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이런 시구였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강준만 교수는 이런 유시민에 대해서 “선한 의지가 지나쳐 부끄러움을 느낄 능력조차 없는 멸사봉공 정신 중독자”라는 후한 평을 한다.

유시민의 존재감이 예전과 같지 않을 때 집중 인터뷰를 통해 ‘유시민을 만나다’를 쓴 작가가 있다. 저자 지승호는 유시민을 ‘슬픔과 노여움이 많은 소셜 리버럴리스트’라고 했다. 다른 정치인들에게 칼날 같은 쓴 소리를 할 수 있는 유시민의 성정이, 바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각에 바탕하고 있다는 시각이다.

이상돈 교수는 김종인·이준석 두 비대위원과 더불어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설화舌禍로 유명하다. 5월 4일 오마이뉴스와 가졌던 인터뷰도 평소처럼 직설적인 표현이었다. “경선 과정에서 박근혜 대세론은 굳건한데 본선은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 “본선은 대세론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즉답했다. 그렇게 평가하는 근거를 야당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모양새를 “병정 수는 많지만 화력이 부족하다.”고 비유했다. 덧붙여서 언급하길 “역동적 경선이 있을 것이고. 그 대선후보를 뒷받침하는 아래 그룹도 얼마나 튼튼한가. ……이번 총선에서 야당이 질 수 없는 선거를 졌지만 결코 야당이 패배했다고 보지 않는다.”고 진단한 것이다. 여당 지도부가 들으면 결코 기분 좋을 리 없는 야당에 후한 점수다. 이런 전망은 반전의 드라마가 없는 여당 경선과정을 감안한 걱정에 기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아이로니컬하게도 ‘경선이 무의미하니 박근혜를 추대하자’고 가장 먼저 주장했던 자다. 그야말로 이율배반의 극치다. 그래서 이상돈은 어떤 면에서 친이도 아니면서 친박도 아닌, 그냥 항상 비판적인 인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며 해를 넘길 것 같다.

그러면 가장 거짓말 잘했던 대통령은 누구일까? 이명박은 2008년 총선 이후 거짓말쟁이로 규정돼 버렸고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었다. 권력자는 리더십에 큰 타격을 받게 되면 결국은 불법적인 통치 수단에 의존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이명박의 경우에는 그것이 민간인 불법 사찰이었던 셈이다.

왜 이명박은 적법과 불법에 둔감했을까? 왜 ‘거짓말쟁이’라는 공격에 추약했을까? 그 이유를 이명박이 사적 영역 private sector에서 주로 경력을 쌓은 인물이라는데 주목한다. 만일 이명박이 공적 영역 public sector에서 주된 경력을 쌓은 공적 인물public figure였다면 사안이 무엇이든 ‘적법 절차’의 문제를 고민하고 준수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시하고, 절차보다 ‘효율’을 더 중시하고, ‘외부 경제’보다 ‘내부 경제’에 민감한 민간 CEO 출신이었다!

최근 BBK 사건 수사에서 ‘이명박 불기소’ 결정을 이끌어내는데 중요한 근거가 됐던 ‘편지’가 조작됐다는 의혹이 새로 제기된 것도 곰곰 되새겨볼 대목이다.

이명박 정부는 위기관리에 취약했다. 미국 쇠고기의 광우병 파동으로 촉발된 2008년 촛불 정국은 이명박 정부가 얼마나 위기관리에 젬병인지를 그 어떤 잘 제작된 다큐멘터리나 영화보다도 더 잘 보여주었다. 자고나면 또 하나 정부 측의 실수와 실언이 이어져, 촛불 집회는 결국 정권을 뒤흔들게끔 되었고 여권 인사들은 ‘촛불’ 말만 들어도 가슴을 쓸어내릴 지경이 되었다. 오죽하면 경찰이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 컨테이너 장벽을 쌓을 생각을 했을까?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자살 사건, 천안함 폭침 사건 등 굵직한 사건들은 이명박 대통령이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데 한몫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보고받은 이명박 대통령의 첫 반응은 “사고 경위를 정확하게 조사하라.”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궁금했을 것이다. 또 사회 일각에서 제기될 수 있을 숱한 의혹과 음모론이 걱정됐을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정확한 사건의 경위와 원인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정파가 다르다고는 하나, 바로 직전 대통령 아닌가? 전직 대통령의 사망, 그 경위가 무엇이든 첫 반응은 무조건 “안타깝다, 애석하다, 우리 정치를 위해 아직 해주셔야 할 일이 많은데…….”라야 하는 것 아닌가?

천안함 폭침 사건에서 순직한 해군 장병의 영결식은 더 가관이었다. 안타까운 죽음이고 치가 떨리는 사건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이, 조국의 바다를 지키다가 장렬하게 산화한 젊은이들의 영전 앞에 모여 조국 수호의 결의를 바치는 것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영결식에 참석한 것은 당연하고도 올바른 결정이었고 거기서 조사를 읽은 것도 좋았다. ‘그들의 귀한 죽음을 잊지 않겠다’, ‘앞으로 북의 도발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는 조사는 결의에 차 있었다. 문제는 대통령의 눈물이었다. 더군다나 눈물 흘리는 대통령의 사진이 당일 석간 1면 머리에 큼지막하게 실렸다. ‘단호한 대처’를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짜고, 눈물 닦는 사진을 그 제목 아래 싣도록 한다? 이것이 이명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박근혜는 위기에 강하다. 위기극복에 얽힌 일화도 몇 가지 있다. 1979년 10·26사태 직후, 비서실장이 깨워 대통령의 유고 사실을 알려주자 첫 마디가 “휴전선은…….” 이었다는 것.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얼굴에 테러를 당하고 수술에서 깨어난 직후 “대전은요?”라고 물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 위기에 강한 여자.

박근혜는 야당 시절 한나라당 대표로서 치른 재보궐 선거에서 전승의 기록을 남기면서 선거의 여왕이라는 영예로운 별명 하나를 더 얻게 된다. 명불허전, 2004년 탄핵 정국에서 선거를 치러내고, 그로부터 8년 뒤인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120석도 쉽지 않다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과반수 의석을 얻어낸다.

어디에서 이런 위기 극복, 위기관리의 힘이 나올까? 리더로서의 DNA가 핏속에 흐르는 것일까? 큰 실수하지 않는 것 또는 결정적인 실수를 하지 않는 것을 박근혜 리더십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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