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부터 시작된 원화값 상승세(환율은 하락)가 최근 주춤한 분위기다.
지난달 중순 1050원대까지 내려갔던 미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이달 8일 1095원까지 올랐다.

최근 환율이 크게 오른 데에는 외환당국의 입장 변화가 있었다.
불과 두 달 전인 작년 12월 중순까지도 외환당국은 외환거래에 대한 추가 규제에 부정적이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작년 12월 10일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1080원 이하로 내려갔을 때 "(외환시장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겠다"고 말했다.

그랬던 박 장관은 한 달여 뒤인 1월 23일 "(외환시장에 대한) 대책이 모두 준비돼 있다"고 언급했고, 이를 기점으로 환율은 급등했다.

그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 기간 정부 내에선 환율정책에 대한 매파(고환율 중시 세력)와 비둘기파(고환율정책에 부정적인 세력)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누가 청와대의 귀를 붙드느냐에 따라 세력균형이 변화했고,
이에 따라 환율정책도 달라졌다.

대선 직전 청와대 긴급회의, "일단 지켜보자"

작년 12월 14일 아침.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김석동 금융위원장,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청와대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았다.

대선을 앞두고 한 달 가까이 열리지 않았던 서별관회의(청와대 정책실, 경제수석실과 경제부처 장관들 간의 정례회의)가 갑자기 소집된 것이다.

김대기 청와대 정책실장이 연락을 했지만, 이날 회의는 이명박 대통령의 뜻으로 열렸다고 한다.


주제는 환율이었다.
당시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시장의 심리적인 지지선으로 여겨지던 1100원이 깨지고, 달러당 1070원대 초반까지 내려간 상황이었다.

복수의 정부 고위 관계자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이렇게 원화값이 올라도(환율은 하락) 우리 경제에 문제가 없느냐. 대책을 만들 필요가 없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다만 외부 시선을 의식해 이날 회의의 공식 주제는 '2013년 경제정책 수립방향'으로 각 부처에 통보됐다.

지방에 현장점검을 간 김석동 위원장을 제외한 박 장관, 김 총재, 권 원장이 이날 오후 청와대에 모였다.

회의에서 환율 문제가 거론되자, 박재완 기재부 장관이 먼저 나섰다.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경쟁력이 떨어지는 부작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저환율은 물가를 안정시켜, 내수에는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국제적인 논란의 소지가 있는 외환규제 도입은 아직 검토할 단계가 아니다.
" 김중수 한은 총재가 말을 받았다.
"환율 하락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하기 때문에,
무조건 고환율이 좋은 것은 아니다.
환율을 떠받치기보다, 이참에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을 펼 필요가 있다."

기재부 장관과 한은 총재가 환율 추세를 지켜보자는 의견을 내자, 청와대도 추가 조치를 요구할 명분이 없었다.

정부는 이날 환율에 대해 면밀히 모니터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회의에 참석한 한 정부 관계자는 "인위적인 외환 규제에 부정적인 현 내각의 색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고 말했다.

연말 연초 환율 급락, 강만수 등 매파 목소리 힘 실려

그러나 환율 하락이 연말과 연초까지 이어지고,
급기야 일본의 무제한 엔화 방출이라는 악재까지 겹쳐
달러 대비 원화값이 1050원대로 떨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강력한 환율 방어가 필요하다는 매파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현 정부 내 대표적인 환율 매파로 알려진 강만수 산은지주회장이 이 기간에 이 대통령과 독대해 "환율 하락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청와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 회장은 이 자리에서 "환율이 내려가면 단기적으로 물가 안정 효과가 있는 것은 사실이나, 중장기적으로 우리나라 제품의 수출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수출기업의 수익이 나빠지고, 덩달아 근로자들의 소득도 줄어 내수를 위축시키는 부작용이 더 크다"는 논리를 폈다.

그는 또 "주요 선진국들이 양적완화 정책을 펴, 국제금융시장에서 일종의 '반칙'을 하고 있는데 우리만 룰을 지켜선 외환시장을 제대로 방어하기 힘들다"는 주장도 했다.

이에 따라 청와대의 기류가 달라졌고, "환율에 대한 대책을 다시 검토하라"는 언질이 청와대에서 내려왔다.

외환당국도 급격한 환율하락과 대외적인 원화값 상승 압력을 두고 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관가(官街)에선 이를 두고 외환시장에 대한 현 정부 내 매파의 판정승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환율이 급격히 떨어지자 박재완 장관도 더 이상 "시장에 맡기자"는 논리를 고수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비록 매파가 줄기차게 주장했던 토빈세 도입은 중장기 과제가 됐지만,
최근 정부가 공개한 추가 외환시장 대책에는 NDF(역외 선물환) 시장에 대한 규제 등 이전까지 외환당국이 부정적이었던 내용들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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