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기관 출신 전관 영입해 로비스트로 활용한다는 비판도

주요 대기업이 올해도 사외이사진을 고위공직자 출신인 '전관(前官)'으로 대거 채울 전망이다.

본지가 26일까지 정기 주주총회 소집을 공고한 10대 그룹 27개 계열사를 조사한 결과,
올해 주주총회에서 선임(재선임 포함) 예정인 사외이사 후보자 48명 가운데 약 38%가 장관 등 고위 공직자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최고경영자(CEO) 등 전·현직 기업인 신분의 후보자는 10%를 조금 웃도는 것으로 집계됐다.

다양한 전문가들이 회사 경영 전반을 심도 있고 다양한 경험과 시각으로 감시한다는 사외이사 제도 도입 취지에서 벗어난다는 지적이다.

검찰·국세청 등 권력 기관 출신 전관 많아

사외이사 후보자의 직업을 보면 교수 출신이 가장 많았다. 48명 가운데 현직 교수는 22명(45.8%)이었다. 이어 고위 공직자 출신이 18명(37.5%)이었다. 하지만 전·현직 기업인은 허기호 한일시멘트 부회장(SK케미칼), 김동욱 전 현대엔지니어링 대표(LG상사) 등 6명(12.5%)에 그쳤다.

특히 올해는 고위 공직자 출신 후보자 비율이 소폭 늘어난 반면, 기업인 출신 비중은 절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기업 평가 사이트인 CEO스코어가 최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10대 그룹 92개 상장사의 사외이사 323명 가운데 전관은 33.7%였다.

교수는 140명(43.7%)이었고, 기업인은 66명(20.7%)인 것으로 집계됐다.

고위 공직자 출신 중에서도 검찰·국세청 등 권력기관 출신 인사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GS는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을,
삼성전자는 송광수 전 검찰총장을,
호텔신라는 정진호 전 법무부 차관을 사외이사로 영입했다.
SK텔레콤은 오대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사외이사로 신규 선임할 예정이며,
현대모비스·현대건설 등도 지방 국세청장 출신 인사를 사외이사로 재선임할 예정이다.

공정거래위원회 출신 고위 공직자의 사외이사 선임도 눈에 띈다.

현대제철은 다음 달 주총에서 정호열 전 공정위 위원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할 예정이다.

최근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고 있는 신세계는 손인옥 전 공정위 부위원장을 사외이사로 선임하기로 결정했다.

재계 관계자는 "경제 민주화가 주요 현안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공정위와 연이 있는 인물을 영입하려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이사회 안건 반대표 제로… '거수기' 논란 여전

사외이사가 기업 내부에서 감시 활동을 제대로 하는지 여부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상당수 사외이사가 해당 기업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나 심도 있는 이해 없이 이사회에서 거수기 역할만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0대 그룹 계열사 이사회에서 사외이사가 안건에 대해 반대표를 던진 경우는 전무한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이사회를 모두 11차례 개최했지만, 사외이사들은 상정된 47건의 안건에 대해 모조리 찬성표를 던졌다.

기업들은 사외이사가 거수기 역할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적극 해명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사회가 열리기 이전에 사외이사에게 안건에 대해 충분히 설명한다"면서 "이사회에 상정되는 최종 안건은 사전에 의견 조율과 수정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반대표가 나오지 않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대기업이 전관을 사외이사로 영입해 방패막이나 로비스트로 활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적지 않다.

대기업에 대한 감시·견제 여론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검찰 조사나 국세청 세무조사 등에 대비한 '보험용'으로 권력 기관 출신 전관을 경쟁적으로 영입한다는 것이다.

사외이사가 받는 지나친 보수도 논란거리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사외이사에게 연 8800만원을 보수로 지급했고, 현대자동차도 8000만원이 넘는 금액을 지급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사외이사의 실질적 감시 기능을 강화하려면 소액주주가 직접 사외이사를 선임하게 하는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면서 "사후적으로는 잘못된 의사 결정에 대해 이사회의 책임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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