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부를 맞아 대통령이 행정부의 고위 공직자를 임명할 때는 공직에 지명된 사람이 자신이 맡을 공직을 수행해 나가는데 적합한 업무능력이나 인간적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하는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치게 된다.

국회의 검증절차를 거치게 되는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국민의 눈높이에 맞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제대로 자격을 갖춘 공직자들을 찾아 보기가 어려운 현실이다. 이러한 때 명문가의 고사와 ‘계영배’의 교훈이 주는 절제와 청렴정신을 살펴 보면서 오늘날을 살아가는 공직자들과 고위 공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길 소망해 보고자 한다.

조선조에서 재상까지 역임하였으면서도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로는 약 18명이 있다. 그 가운데 단연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이가 조선 초 세종 시대의 재상으로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으며,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존경을 받았던 황희(黃喜, 1363~1452)이다.

황희의 맏아들은 일찍부터 출세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돈을 모아 살던 집을 새로 크게 짓고 낙성식을 하였다. 말이 낙성식이지 크게 잔치를 베푼 터이라 그 자리에는 고관들과 권세있는 친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집들이 잔치가 시작되려 할 때, 아버지 황희가 돌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선비가 청렴하여 비 새는 집안에서 정사를 살펴도 나라 일이 잘 될는지 의문인데, 거처를 이다지 호화롭게 하고는 뇌물을 주고 받음이 성행치 않았다 할 수 있느냐. 나는 이런 궁궐 같은 집에는 조금도 앉아 있기가 송구스럽구나.” 그리고는 음식도 들지 않고 즉시 물러가니, 아들은 낯빛이 변하였고 자리에 참석하였던 손님들 역시 무안해졌다.

황희 본인은 비가 새는 초가에서 살면서, 있는 것이라고는 누덕 누덕 기운 이불과 서책이 전부였다고 하니, 아들의 호사가 불편했을 것이다. 과연 최장수 재상을 지냈으면서 이처럼 청빈하였으니 청백리가 됨은 당연할 것이다. 황희 정승이 죽었을 때는 워낙 가진 게 없어 미리 준비해두었던 수의 한 벌을 찢어서 가족들이 상복으로 입었다고 한다.

조선 명종 때 박수량(朴守良, 1491~1554)은 청백리였다. 평양감사에 병조판서까지 38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 비가 새는 초가집에서 살았다. 임금은 퇴직 후에도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산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청렴한 인품에 감복한 명종은 그의 고향 전남 장성(長城)에다 49칸 집을 지어 청백당으로 사명(賜名)했다. 그가 죽었을 때도 임금은 단아한 그의 일생을 기리기 위해 아무런 비명을 쓰지 않는 백비(白碑)를 세웠다. 돈에 대한 유혹은 공직자라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그런 검은 마음을 이길 수 있을 때 백비를 세워주고 백성은 감동하게 된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이자 정치가로 조선 사회의 제도 개혁을 주장했으며, 우리나라의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명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선생도 공직생활 하는 동안에 뇌물을 받은 적이 없는 철저한 청백리의 모습으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대한민국 정치인들과 고위 공직자를 꿈꾸는 사람들 중에서 위와 같은 선인들 같이 하지는 못할망정 본받으려는 노력이라도 꾸준히 하여 이에 근접한 사람이라도 찾아 볼 수 있는지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기에, 욕망에 일정한 제어를 걸어주는 건 타인의 원망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준다. 현재 상황을 굳건하게 지켜주는 역할도 한다. 결핍은 불편한 상태라고 생각되지만, 오히려 결핍이 현재를 유지시켜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전국춘추시대 제나라의 군주인 환공(桓公, ?~BC 643)은 ‘계영배(戒盈杯)’를 선호했다고 한다. 술잔에 70% 이상 술을 따르면 밑으로 몽땅 빠져 버리는 이 잔의 교훈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이다. 즉 정도를 지나침은 도리어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로 사물은 중용(中庸)이 중하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으로써 더 많이 가지고자 함은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긍정적인 해석도 가능하지만, 때로는 인간관계에서 자신을 곤란에 빠뜨리는 함정이 되기도 한다. 조금은 비어 있는 상태, 약간은 부족한 상태를 유지하면 오히려 삶은 윤택하고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대대손손 역사에 족적(足跡)을 남긴 명문가에는 욕심에 대한 절제와 청렴등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기에 몇가지 사례를 들어 오늘을 살아가는 공직자들에게 교훈으로 삼고자 한다. 

‘열자(列子)’의 ‘설부편(說符篇)’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중국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호구(狐丘)라는 마을에 사는 한 노인이 초나라의 재상 손숙오(孫叔敖)에게 물었다.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원망의 대상이 있습니다. 혹시 그에 대해 아십니까?”
손숙오가 고개를 가로저으니 노인이 이야기했다.

“사람들은 직위가 높은 이를 질투하고 많은 녹을 받는 관리를 원망합니다. 또 임금은 벼슬이 높으면서도 현명한 신하를 싫어하지요.”
손숙오가 말했다.

“직위가 올라갈수록 뜻을 더욱 낮추고, 벼슬이 높아질수록 욕심을 더욱 적게 가지며, 녹이 많아질수록 더욱 많이 베푼다면 이 세 가지 원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겠군요.”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죽음을 앞둔 손숙오는 아들을 불러 유언을 남겼다.

“그동안 임금께서 내게 땅을 하사하려 했지만 나는 결코 받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이제 너에게 땅을 내리시려 할 것이다. 하지만 절대 좋은 지방의 땅을 받아서는 안 된다. 초(楚)나라와 월(越)나라 사이에 침구(寢丘)라는 지방이 있다. 그곳은 위치도 좋지 않고 명성 또한 나쁜 곳이니 그곳을 받아라.”

손숙오가 죽고 나자 임금은 그의 아들에게 땅을 내리려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기름진 옥토와 아름다운 지역을 거절하고 침구 지방을 요구했다. 결국 손숙오의 후손들은 오래도록 그곳에서 잘 살 수 있었다.

조선시대 대제학을 가장 많이 배출했으며 문과 합격자만 200명이 넘었던 연안(延安) 이씨 가문은 ‘넘침을 경계하라’는 뜻의 계일(戒溢)을 가훈으로 삼았다. 세조 때 대사헌을 지낸 저헌(樗軒) 이석형(1415∼1477)은 만년에 성균관 서쪽 연못에 계일정(戒溢亭)을 짓고 수신(修身)했다. 물이 넘치는 것을 경계하듯 매사에 분수를 지키려 노력했던 것이다.

‘붓 재주 하나로 대성할 생각을 말라’는 좌우명으로 자유와 재능을 조화시키려 노력했던 남종화의 거장 소치(小癡) 허련(1808∼1893)의 집안을 보자. 전남 진도를 중심으로 5대 200년에 걸쳐 13명의 화가를 배출해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이뤄낸 소치 가문은 재주꾼과 거장은 다르다고 봤다. 아무리 시(詩)·서(書)·화(畵)에 재주가 많더라도 폭넓은 지식과 좋은 인성이 없으면 거장은 될 수 없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베품과 나눔의 삶을 실천한 소치의 손자 남농(南農) 허건(1908∼1987)의 유산은 특별하다.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그가 머물던 목포 집은 늘 그림을 얻으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도 그림 적선(積善)을 많이 하는 바람에 그림값이 떨어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경주 최부잣집의 큰집인 경주 최씨 정무공 종가에서 조선 중기부터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면목을 보여주는 ‘만석 이상의 재산을 쌓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을 계승해 왔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고문헌 3000점이 발견돼 화제다. 경주 최부잣집의 큰집인 경주 최씨 정무공 종가가 노비나 소작인의 빚을 탕감해 주고 병자호란 중 전사한 충노(忠奴)를 표창해 달라는 등의 내용이 많다고 한다. 화적(火賊) 떼의 습격으로 인명과 재산 손실을 본 뒤 상생의 길을 찾기 위한 방책이었다. 미움과 증오가 아닌 나눔과 배려로 주위를 밝게 만든 최씨 가문의 선견지명은 오늘날에도 많은 가르침을 준다.

위의 사례와 반대로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비극의 사례가 독일 문학의 최고봉이라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가문이다. 부친(父親)의 맞춤형 교육으로 ‘만들어진’ 천재 괴테는 41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도 자기가 받았던  교육방식으로 키우려고 애썼다. 괴테의 아들은 학습, 진학, 취직은 물론이고 부대배치까지 간섭하는 아버지의 관심과 기대를 견뎌내지 못했다. 아들은 결국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이탈리아 여행 중 요절했다.
  
위의 이야기는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과유불급의 진리는 동서고금과 시대를 초월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에  앙불괴어천(仰不愧於天) 부부작어인(俯不怍於人) 즉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의미로써 매사에 공명정대(公明正大)하여 마음에 한 점의 흐림도 없음을 군자삼락 중 두 번째 즐거움이라고 했다. 뇌물은 주는 사람은 아무 이유 없이 뇌물을 줄 리가 없으며, 뇌물을 받고도 모른체 할 수 없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인 것이다. 뇌물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기에 존재한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목민관(牧民官), 즉 백성을 다스려 기르는 벼슬아치인 고을의 원(員)이나 수령(守令)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말한 “청렴은 공직자 본연의 의무이며, 모든 옳은 일의 근원이고, 모든 덕행의 뿌리이니, 청렴하지 않고 능히 공직자 노릇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는 오늘날에도 공직자가 명심해야 할 구절인 것 같다.

뇌물을 주지도 받지도 않는 뇌물이 없는 세상과 그런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넘치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효와 행복연구소 소장 / 교육학박사 고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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