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독립운동가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ㆍ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차경신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30일(화) 밝혔다.

선생은 국내에서 부인회, 간호대 및 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어학교 초대교장 및 대한애국부인단 총단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선생은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하였다. 선생은 모친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각한 평등관을 정립하고, 민족대표 양전백 선생이 세운 보성여학교에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지닌 인물로 성장하였다.

졸업 후 명신학교 교사로 활동하다 다시 정신여학교 사범과에서 수학한 선생은 이후 함남 영생학교, 진성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민족교육의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1918년 선생은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유학을 떠나 평생의 동지인 김마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듬해 요코하마 유학생 대표였던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2?8독립선언서 전문을 국내 반입할 것을 논의하고 부친의 사망을 구실로 국내로 들어왔다.

2월 15일 부산항에 도착한 선생은 김마리아와 함께 비밀장소인 백산상회에서 신한청년단 당수 서병호 등을 만나 여성 단체 조직을 계획하였고, 평북 선천에서 신한청년당 회원 50여 명을 모집하여 선천지역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활동에 주력하였다.
 
일제의 감시로 국내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선생은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하였으며, 1919년 11월 대한청년단연합회 총무로 평안도 지역에서 여성단체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국내를 오가며 임시정부 지원활동을 전개했다.

만주에서의 활동도 일본군의 토벌에 의해 유지를 할 수 없게 되자 상해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해나갔다. 이 당시 모친 박신원이 일경에 체포되어 온 몸에 화상을 입는 참극을 당하게 되자 선생의 민족의식은 더욱 강하게 불타올랐다.

1920년 8월 보다 구체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상해로 온 선생은 도산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며 비밀요원으로 활약하였고, 대한국민회부인향촌회 등 국내 항일여성단체와 계속 연락하면서 군자금 모집과 연락망 구축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4년 1월 김마리아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간 선생은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와 교회주일학교에서 주일공과를 맡았고, 샌프란시스코 대한여자애국단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6년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어 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도 진력하였다.

1933년부터 39년까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 각지에 지회를 확대 조직하고 임시정부 및 국내외 동포들의 구제사업에 힘썼으며, 이밖에도 도산 안창호와 연계 하에 국민회, 흥사단에서 활동하였다.

 이렇듯 광복의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조달과 여성교육에 큰 몫을 담당했던 선생은 1978년 9월 2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별세하였다.

선생의 활동은 여성들에게 정치의식, 자유민주주의 의식 등을 고양시키는 데 큰 영향을 미쳐 자신이 삶의 주체이며 인격체라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으며, 해방 이후 차별받는 여러 권리들을 주장하게 되는 여성운동의 역사를 계승할 수 있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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