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장 인선 늦더라도 적임자 제대로 선정해야 한다.   

청와대가 공공기관장 인선 작업을 잠정 중단하고 전면 재검토하기로 했다. 최근 금융기관장들이 잇따라 특정 부처 출신으로 채워졌고 이것이 '관치(官治)'와 '부처 낙하산' 논란을 일으키자 청와대가 일단 제동을 건 것이다.이에 따라 공공기관장의 인사 쇄신의 폭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18일  공공기관운영위원회를 열어 공기업과 준정부기관 등 110여곳의 지난해 경영실적 평가 결과를 발표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첫 경영평가 결과다. 경영실적 평가는 최고경영자 물갈이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기관장 인선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공기관장 선임 기준을 명확히 한 뒤 인사를 단행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이번 청와대와 정부가 공공기관장 인선에 제동을 걸은 것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 원칙을 무색하게 할 만한 잡음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국정철학 공유’가 또 다른 낙하산 인사나 보은 인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박 대통령은 지난 1월 30일 국정과제 토론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낙하산 인사가 새 정부에서는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스템에 의한 인사로 경영 혁신을 통해 부채와 수익성 악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적임자를 골라내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김행 청와대 대변인은 “박근혜 정부에는 낙하산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한편 17일 정부의 주요 부처들은 지난 11일부터 '진행 중인 공공기관장 공모 절차(서류·면접 심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산하 기관에 전달했다. 이는 청와대가 공공기관장 인선이 논란이 일자 일선 부처에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에 따라 코레일, 한국수자원공사와 한전의 발전 자회사 등 10여곳의 인사 작업이 멈췄다. 그러나 이미 선임 절차가 끝났거나 기관장이 연임되는 곳은 제외됐다.

공모절차를 중단한 청와대는 공공기관장으로 검토되는 후보자를 단일 군으로 하지말고 수(數)를 늘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대해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정실(情實) 인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개선책"이라고 말했다.이처럼 청와대는 공공기관장 후보군을 대폭 늘려 검증하는 방식을 선택하기로 한 것은 청와대가 민간 전문가 등을 두루 찾기 위해서다.

공공기광장의 공모 기준은 국정철학 공유 외에 전문성, 경영평가 결과 등이 기관장 선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다. 청와대는 배점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포함해 객관적 기준을 정립해 인선작업을 마무리 해야 할 것이다.

최근 금융 공기업과 일부 금융회사의 수장에 잇따라 ‘모피아(옛 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 출신들이 선임되면서 관치 논란은 커져갔다. 임종룡 NH농협금융지주 회장,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 김근수 여신금융협회장, 김익주 국제금융센터 원장 등 경제 관료 출신이 발탁된 게 그 예다. 이들은 행정고시 20~26회로 선후배지간이다.

금융계만이 아니다. 국토교통부 산하의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에는 정창수 전 국토해양부 차관, LH공사 사장에는 역시 국토부 출신의 이재영 경기도시공사 사장이 기용되면서 노조 반발 등 잡음을 빚고 있다. 코레일·한국수자원공사·한국수력원자력·한국가스공사·한국지역난방공사 등도 새 최고경영자(CEO)로 각각 상부 부처의 옛 관료 출신들이 거론되고 있다.“전형적인 관료 낙하산”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공공기관장 인사를 둘러싼 잡음은 이뿐이 아니었다. ‘대선 공신(功臣)’이나 친박 정치인의 내정설이 그것이다. 특히 공모 접수 마감도 끝나지 않았던 한국거래소 이사장에 최근 친박근혜계인 김영선(4선) 전 새누리당 의원이 내정됐다는 소문이 돌면서 청와대를 움직이게 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대선 캠프에서 재외 국민을 담당했던 자니 윤씨도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한국관광공사 사장 낙점설이 돌기도 했다. 물론 다 근거가 없는 얘기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화를 냈다”고 한다.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김행 대변인을 통해 지난 10일 김 전 의원의 내정설을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청와대는 그리고 이튿날 곧바로 기관장 선임 잠정 중단 지침을 하달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입장에서 조원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지난 13일 기자들과 만나 “좋은 관치도 있을 수 있고 나쁜 관치도 있을 수 있다”고 방어에 나섰지만 이 역시 역풍을 맞았다. 특히 금융감독 당국이 이장호 BS금융지주 회장에게 사퇴 압박을 가한 것이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한 것 같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17일 국회 정무위원회 긴급 업무보고에서 “금융당국이 민간금융사 회장의 사퇴를 종용할 권한이 있느냐”는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의 지적에 대해 “은행 담당 부원장이 신중치 못한 부분이 있었다”고 사과했다. 민병두 민주당 의원이 17일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금융공공기관장의 68%가 이른바 ‘모피아’(옛 재무부 관료) 출신인 것으로 나타났다. 정부는 특정 인물을 자리에 앉히기 위한 금융당국 수장들의 인사 간섭이나 발언이 더 이상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공공기관장 인선 기준으로 두 가지를 주장한다. ‘전문성’과 ‘국정 철학의 공유’다. 대선에 공이 있더라도 정치권 인사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최소화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최근 공공기관의 인사에 대해선 여권에서도 “해도 너무했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각 부처에서는 대부분의 산하 기관장에 자기 부처 출신을 선임했거나 내정했다. 관치 논란이 금융뿐 아니라 국토교통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의 산하기관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부처들은 마치 관료 출신들이 전문성이 강하고 이들을 공공기관장에 앉히는 것이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기회에 이런 인식은 고쳐져야 한다.

청와대 책임론도 도마위에 올랐다. 박 대통령은 지난 3월 11일 첫 국무회의에서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기관에 대해 앞으로 인사가 많을 것이다.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밝힌 바 있다.

대통령의 의중과는 달리“공모 절차를 거치거나 후보자를 넓히더라도 청와대 인사위원회"가 사전에 부처와 협의해 공공기관장을 낙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대통령이 국정 기조에 맞는 사람을 임명해달라고 요청했을 때부터 특정 인맥 편중 및 낙하산 논란은 피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지금 역대 어느 정부 때보다 공무원의 내부 승진이 많고 전문성이 중시되고 있다”며 “관료나 국회의원 출신이라고 무조건 배제하는 건 옳지 않지만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기관장으로 가는 건 옳지 않다”고 말했다.

이번 청와대의 인선 중단 조치가 “베스트 오브 베스트(최고 적임자)”를 고르는 과정이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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