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계도 굴복시킨 삼청교육대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슈>서울행정법원이 군부독재 시절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저항한 행위도 민주화운동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로 지난날 삼청교육대 사건이 조금씩 고개를 들고 있다. 이에 중앙뉴스는 지난날 이유도모르고 단지 지역에서 불량스럽다는 이유만으로 소리없이 끌려가 어떤이는 죽고 어떤이는 장애자가 되어 돌아온 사건들을 되집어 보기로 한다.

삼청교육대는 말만 들어도 공포처럼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삼청교육대 사건은 신군부 정권으로 잘 알려진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작품이다. 사회악 일소 방침에 따라 사회악 범죄자와 정치범, 무고한 시민 등 6만755명을 영장 없이 체포돼 소리없이 끌려간 사건이다.

이들 중 3만9742명은 군부대로 보내져 가혹한 순화교육을 받았다. 4주간 진행된 유격훈련, 공수기초훈련, 목봉체조에 구타까지 당해 54명이 숨지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한 병사는 “건장한 현역병도 하루 종일 받으면 쓰러질 정도로 강도가 셌다”고 증언했다.

지난 80년초 1980년 8월 인천 강화군의 농부 이모(74·당시 41세)씨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과 싸우고, 술에 취해 마을 농협 유리창을 깨뜨린 것이 삼청교육대의 입소감이었다. 군부정권은 당시 '계엄포고 13호'를 내리고 '불량배'라며 6만755명을 영장 없이 붙잡았다.

이씨는 삼청교육대에 머물던 10개월 동안 수차례에 걸쳐 군부에 대항했다고 한다. 이씨는 "무고한 국민을 잡아다 때려잡는 전두환 정권과 군 당국에 책임을 묻겠다"고 저항하다 특수교육대에 편입돼 더욱 심한 고초를 겪었다. 이 씨는 10개월을 그리 핍박당하다 다리에 장애를 얻어 퇴소했고, 삼청교육대 진상규명과 피해보상 활동을 벌여 왔다.

이 일로 이씨는 2001년 민주화 운동 보상심의위원회에 보상금 신청을 했지만 2006년과 2012년 두 차례나 기각당했다. 당시 보상심의위원회는 이씨가 삼청교육대에 입소하게 된 경위가 민주화 운동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고 삼청교육대에서 장애를 얻었다는 것은 피해자의 주장에 해당하며 2004년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제정·시행돼 이씨가 이 법률에 의해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다는 점을 들어 기각했다.

보상심의위원회와는 달리 최근 서울행정법원은 당시 이씨의 저항이 '민주화 운동'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결국 33년 만에 정부를 상대로한 승리다. 재판부는 "이씨가 개인적인 권리 구제 차원을 넘어 권위주의적 통치에 직접 항거해 민주헌정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를 회복·신장시키는 활동을 하다 상이를 입었기 때문에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판결 이유를 밝혔다.

이씨가 인권을 무참히 짓밟은 삼청교육대 교관들에게 용감하게 저항한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씨의 항거가 곧바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하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확대시키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들린다.

시인 '박노해'는 삼청교육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깍지 끼고 땅을 기다 부러진 손가락과 영하 20도의 땅바닥에서 동상 걸려 진물 흐르는 발바닥, 얻어터져 성한 곳 하나 없는 마디마디에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벌건 피똥을 싸며, 처음으로 소리죽여 흐느끼다, 아 여기는 강제수용소인가 생지옥인가” 라며 시인 박노해가 노래한 삼청교육대의 참상이다.

이유도 모르고 끌려간 사람들! 식사시간은 자유롭지 못했고 훈련과 노동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먹을 물을 주지 않아 웅덩이에 고인 흙탕물도 마셔야했던 그들이다.지금도 삼청교육은 무서움 그 자체다. 삼청교육을 실행한 부대들 마다 여건과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모질었던 그 시절, 그 시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삼청교육대 생활수칙 제1조다. 도망치는자 사살한다는 원칙..

기자는 한때 고향에서 잠시 방송사업을 한 적이 있다. 고향은 중부전선에 해당하는 시골마을이고 대부분 군부대가 지역 구석구석 많이 배치되어있는 전방지역이다. 이때 기자도 여러 부류의 삼청교육 수감자들을 볼수있는 기회가 많았다.

위에서 지적하듯이 여건과 상황이 지역마다 다소 차이가 있었겠지만 기자가 머물렀던 전방지역은 대부분 폭력 전과자들이 군부대에 수감 됐다. 등과 팔뚝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것 같다. 시골 마을도 예외는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가 없어졌네,누가 붙들려같네 하는 등의 소문이 동네에 퍼졌다. 기자도 삼청교육대 사건을 잘 알고있다.그시절 동네 불량배를 색출해 내는것은 정화위원장이라는 직함을 달고있는 동네 유지가 담당했다.

신군부는 삼청교육대를 시행할 때 내세운 것이 사회악을 뿌리 뽑기 위해 지역마다 문제아로 분류하고 있는 건달들과 불량배(?)들을 데려다 강제로라도 순화(?)시키겠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였다. 그러나 신군부는‘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쿠테타로 인한 군부의 정권장악에 대한 반발과 비판 여론을 잠재우려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고 불량배 소탕은 적당히 끼워 넣은 면피용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

흥미로운 것은 삼청교육대에는 유독 승려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당시 조계종은 여러가지 현안문제를 해결하고 자체적인 체제정비를 마치고 종교계의 새로운 도약을 하려던 시점이었다. 이런 와중에 조계종은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 ‘정교분리’ 원칙을 고수하며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대한 지지성명을 끝내 내놓지 않았다.

이것이 화근이 돼 10.27 법난이라고 불릴정도로 참극을 겪었다.참극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2008년 2월 국회에서 ‘10.27법난 피해자 명예회복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으니 참극이라 부르는 배경을 어느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협의회와 진보적 교단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의 흐름도 있었지만 대형교회 목사들을 주축으로 해 다수가 신군부에 굴종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사건이 1980년 8월 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을 위한 조찬기도회’이다. 대통령도 아닌 군 장성을 위해 교회가 대거 동원되고 KBS와 MBC가 전국에 생방송으로 이 기도회를 중계한 것만 보더라도 당시 신군부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두려움의 존재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도회에 참석한 대형교회 목사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이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지우고 싶으나 지울 수 없는 씁쓸하고도 수치스런 장면으로 영원히 기억 될 것이다.이날의 기도회의 합심 기도 덕에 전두환 전 대통령은 줄지 않는 29만원의 요술 통장으로 여생을 풍족히 보내고 있는 것 같다.

10월 27일 불교계는 참극을 당하고 보름 뒤인 11월 14일 CBS는 뉴스 기능을 빼앗기고 상업광고를 압수당했다. 종교계는 물론 언론계 역시 구조조정과 통폐합을 거쳐 관변언론체제로 탈바꿈해 ‘땡전 뉴스’를 시작하게 되는 시점이 된 것이다.

삼청계획 5호는 삼청교육을 받을 대상을 ‘전과자나 개전의 정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라고 애매하게 규정하고 경찰서별 강제할당량까지 지정하기도 했다. 또 삼청교육이 끝난 뒤에도 ‘사회보호법’에 의해 군 감호소나 청송 감호소로 옮겨져 죄수 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수감자들이 가장 곤혹스러워 했던 것은 꼬리표다. 주민등록 등초본 상단에는 ‘삼청교육 순화교육 이수자’라고 낙인이 찍혀 있어 사회 전반에 걸쳐 피해를 입는 최대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즉, 취업할 때 이사를 갈 때 대출을 받을 때 등 수시로 불이익을 당했다.

이처럼 삼청교육대 사건은 국가 공권력의 폭력 구조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 사건이다. 국가 공권력이 집권세력의 통제무기가 돼 국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과정을 압축해서 보여준 살아있는 역사다.

60년대 5.16 쿠데타 세력은 부랑인들을 질서교란자로 지목해 국토재건대에 편입시켰고, 삼청교육대는 불량배를 내세워 폭압의 근거와 정치적 탄압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이런 조작된 위험과 위협을 사회에 퍼뜨리기 위해 언론이 동원되고, 이것을 밀어붙이는 지배 권력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종교가 동원된 것이다.

그리고 누구에게 어떻게 폭력을 휘두를 것인지에 대한 판단도 권력이 독점한다. 엄연히 사법부의 몫이지만 긴급조치, 계엄령, 포고문 등 방법은 얼마든지 만들어 낼수가 있는 것이다.모든 권력이 신군부에의해 통제되고 나오는 시대를 우리는 수십년전에 살았다.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에서 여야가 국가 권력의 남용을 견제하거나 감시하지 않고 또한 언론이 비판 기능을 상실하고 피난처인 종교가 민중보다 권력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거대한 국가폭력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국가 권력 속에서 배양되는 폭력은 거대한 참화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민적 저항에 부딧칠수도 있다. 

삼청교육대 피해자의 고통은 이처럼 현재진행형이다. 삼청교육대 기획자인 전 전 대통령은 이번 판결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사회악 일소가 삼청교육대의 목적이라면 정작 그곳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광주학살에 수천억원의 뇌물을 받은 전 전 대통령 자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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