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무얼 남겼나

▲ 지난 2일 국회 특위 회의실에서 열린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 첫날 전체회의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일부 민주당 측 의원들의 위원 자격 문제를 거론하며 퇴장해 파행을 겪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불거진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이 정치권을 강타했을 때, 그동안 음지서 머물던 국정원은 양지로 나와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쟁에 한 복판에 섰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 카드를 들고서다.

당시 야권에서 선거 개입 의혹 문제를 어그러뜨리기 위한 정략으로 보고 국정원을 몰아세웠지만, 남재준 원장은 물러설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국정원과 정치권이 정면충돌한 양상이었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이 논란의 먼지가 점차 가라앉고 있다. 그러면서 국정원이 얻은 것과 잃은 것이 무엇인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당시 국정원은 대화록 공개 명분을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대화록의 핵심 쟁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를 포기한다고 했는지 여부였다.

여권에선 포기를 야권에선 수호에 각각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지루할 만큼 논쟁을 이어갔다. 급진적인 보수와 진보 그룹의 지지를 등에 없고서다. 자연히 여론의 관심은 국정원 선거 개입 의혹과 NLL 포기 논란으로 분산됐다.

결과는 소모전이었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떠나 힘과 힘이 부딪히는 해석논쟁만이 있었던 것이다.

여야가 세밀하게 따져보자며 국가기록원에 있는 대화록 원본과 관련 자료를 공개하기로 했지만, 해석논쟁이 끝날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히려 국가 정상간의 대화가 정치적 이유로 세간에 퍼졌다는 측면에서 좋지않은 선례를 남겼다는 우려가 압도적이다. 달리 얘기하면 승자없는, 진실없는 논쟁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큰 셈이다.

이 문제가 이렇게 일단락될 조짐을 보이면서, 전선은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규명으로 옮겨졌다.

여야는 '국정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라는 긴 이름의 특위를 꾸렸다. 그러나 시작부터 파열음이 나고 있다.

일부 특위위원의 적격성 여부를 두고 벌이는 여야간의 기싸움은 국조 파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정정상적인 회의 진행이 어려워 국조가 결국 용두사미 [龍頭蛇尾]에 그칠 확률이 높다는 게 대체적 분석이다.

이런 시각을 뒷받침하는 통계도 향후 국조 진행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1987년 국회 국정조사권이 부활한 이후 진행된 국정조사는 총 21건이다.

국회홈페이지 의안검색 시스템에서 모든 국정조사의 활동 내역을 분석한 결과 국정조사특위가 결과보고서를 채택한 국정조사는 단 8건(38%)이다. 

여야 정쟁거리가 크게 부각된 사건일수록 성과는 미미했고, 보고서가 채택된 사건은 국민적 관심도가 높지만 여야 정쟁거리가 첨예하지 않은 사안이다.

보고서를 채택하더라도 후속 입법조치를 마련치 않아 성과 없이 끝난 국조도 여럿 있었다.

명지대 신율 교수는 "현실적인 대안을 얘기해야 하지만 여야가 모두 상대방의 약점만 물고 늘어지고 있어 일정 수준 이상의 건설적인 대안은 나오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비관적으로 전망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느긋한 쪽은 새누리당과 국정원이다.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최근 기자들과 만나 "무조건 국정조사는 해야 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면서 "어떻게든 끌고 나가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고 국정원이 여유를 갖고 강건너 불구경할 처지는 아니다. 양지로 나온 국정원이 제자리인 음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러야 한다.

그래서 나오는 게 국내파트(대공정보, 방첩, 테러, 국제범죄) 해체다. 이 얘기는 주로 야권에서 나온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합의한 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실현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는 시각이 우세하다.

우선 남북분단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에 국내파트 해체는 안보에 커다란 위협이 될 거란 논리를 반박하거나 깨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다.  

국정원 출신인 새누리당 이철우 의원은 10일 국내정치 파트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정치 집단이라고 해서 대공, 대북과 관련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면서 "대북 관련 정보는 정치권 뿐 아니라 경제, 문화 등 모든 정보를 다 수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개혁의 키를 쥐고 있다는 사실도 대대적 개혁 가능성을 작게 점치게 한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개혁방안 스스로 마련하라"며 남재준 원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국정원은 태스크포스(TF)를 만들어 개혁작업에 착수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는데, 핵심은 국내파트를 그대로 유지하되 정치개입 소지를 없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국정원이 진행하고 있는 것이 인적 쇄신이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장의 인사권을 주요 간부들에게 넘겨 '자기사람 심기'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문제이지, 조직 존폐가 본질이 아니라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국정원 전신인 안기부 이병호 前 차장(울산대 초빙교수)은 '國情院 개혁의 요체는 정체성 재확립'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국정원은 1961년 중앙정보부로 출범한 이후 여러 번 자체적 개혁을 시도해 왔다. 특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개입 금지, 대북 정보와 해외 정보 강화가 개혁 방향의 주 메뉴였다. 그러나 이번 국정원 댓글 스캔들에서 보듯이 이런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그렇다면 대통령의 관심 사안에 따라 국정원의 업무가 이리저리 흔들려선 안 된다. 원세훈 전 원장의 지시에는 대통령의 외교 성과와 4대강 홍보가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정보 업무의 일탈이다. 이처럼 국가 정보 수장마저 국가정보 운영의 기초적 개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으니 그 운영이 온전할 리 없다. 작금의 사태는 이와 같은 부실한 운영의 결과다. 따라서 안보기관으로서의 국가 정보기관의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것, 이것이 국정원 개혁의 요체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일반 정책 정보에도 손을 대는 관행이 사라질 것이고 동시에 정치 개입 여지도 근본적으로 차단될 수 있게 될 것이다."

국정원 국내파트 해체보다는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보수 그룹의 공감대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철우 새누리당 의원은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인적장치를 하는게 더 중요하다"며 "국정원장, 차장 등 정무직은 국민 누가 봐도 '저 사람은 절대로 정치에 관여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중립적 인물을 (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정국의 흐름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면, 국정원은 큰 출혈 없이 다시 음지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남재준 원장 해임은 없던 일이 되고, 국정원 개혁은 최소한에 그치며,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규명도 유야무야될 공산이 크다.

국정원이 NLL대화록을 꺼내면서 내세웠던 명예가 큰 손상없이 지켜지게 되는 셈이다.

또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으로 박근혜정부에 대한 정통성 시비가 일고 있는 것과 맞물려 대선 불복종 조짐이 엿보이는 상황에서 이런 정서를 수면 밑으로 가라앉힐 수 있는 효과를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청와대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이 "대운하를 염두에 두고 진행된 것"이란 감사원 감사 결과를 전하면서, 원세훈 국정원 시절 등 전 정권과의 차별화에 적극 나서고 있다.

무학(武學)적 관점에서 보면, 상대의 약점이나 허점을(남북정상 대화록)을 치면서 이득(정통성 시비 차단으로 인한 정권수호)을 얻는 허허실실(虛虛實實)전략이 통했다고 볼 수 있다. 

국정원은 이례적으로 보도자료를 내어 "남북대치 상황에서 방첩활동과 대테러 활동, 산업 스파이 색출 등 정보기관 본연의 업무는 강화하고, 정치개입 등의 문제소지는 없도록 할 것이며, 과거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이를 적극 바로잡아 새로운 국가정보기관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자신했다.

이명박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한 정치인은 "국정원 선거 개입 문제 등에서 벗어나고 싶은 청와대가 이명박 정권과 다르다는 모습을 보이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라며 "이런 식으로 해봐야 얼마나 득을 볼 수 있겠느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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