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야 노~올자

전북 전주시 풍남동의 동문거리는 1970~1980년대 전주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중심지였다. 거리에는 헌책방과 음악감상실이 즐비했고,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던 명소였다. 그러나 이제는 몇 곳의 책방과 미술학원들만이 남아 있다. 최근 이곳에 변화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3월 ‘전주시민놀이터’가 문을 열면서부터다. 7월 21일 이곳을 찾았을 때는 미술수업이 한창이었다.

연중무휴, 24시간 운영되는 전주시민놀이터가 생기면서 문화활동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연중무휴, 24시간 운영되는 전주시민놀이터가 생기면서 문화활동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쓱싹쓱싹’

이하영(19)양의 손이 분주하게 오간다. 15분이 지났을 무렵, 어느새 하얀 종이 위에 정물화 밑그림이 완성됐다. 이양의 그림을 지켜보던 서완호(30)씨가 “너무 자세하게 그릴 필요 없어”라고 말했다.

“어차피 색칠하기 전에 다듬을 거니깐 지금은 디테일보다 전체적인 구도를 보는 게 중요해. 밑에 놓인 맥주병이랑 네가 그린 그림을 한번 비교해봐.”

“선생님, 이 정도면 됐어요?”

“일단 어느 정도 그렸으면 멀찌감치 떨어져서 봐. 그림은 눈앞에서 가까이 보는 거랑 멀리서 보는 거랑 다르거든.”

“정말 그래요. 왼쪽 부분을 다시 그려야 할 것 같아요.”

이양의 꿈은 미술교사다. 중학교 2학년 때 미술학원에 다니면서 미술에 흥미를 느꼈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미술에 대한 꿈을 접었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지난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 미대 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지만 하고 싶은 걸 해야 행복하다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었다.

현재 이양은 전북대 미대에서 석사 과정 중인 서씨에게 무료로 레슨을 받고 있다. 지인을 통해 이양의 사연을 듣게 된 서씨는 “하영이가 재수를 하고 있는데 집에서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미술에 대한 아이의 열정이 좋아 보여서 도움을 주게 됐다”고 말했다.

2개월 전부터 수업을 시작한 두 사람은 한동안 ‘떠돌이 생활’을 했다. 수업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공간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서씨 지인의 사무실, 학교 강의실 등 이곳저곳을 옮겨 다녔다. 그러던 중 전주 시민들이 자유롭게 문화예술활동을 하도록 24시간 개방되는 전주시민놀이터를 알게 됐다.

같은 시간, 다른 공간에선 20여 명의 주부들이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전승이(51)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 시민놀이터를 방문한다. 저녁엔 이곳에서 동호회 회원들과 대금을 연주하고, 낮에는 경제 스터디를 하기 때문이다. 전씨는 “지역에 이런 공간이 생기니 악기를 연주하고, 공부도 할 수 있게 돼 좋다”며 “다양한 문화활동을 할 수 있어 기쁘다”고 만족스러워했다.

지난 3월 30일 전주시민놀이터가 문을 연 이후로 이때까지 2천여 명의 전주 시민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지난 3월 30일 전주시민놀이터가 문을 연 이후로 2천여 명의 전주 시민들이 이곳을 다녀갔다.

전주시민놀이터는 지난 3월 30일 문을 열었다. 시민들에게 연중 24시간 개방하는 문화예술 공간으로 전국 최초다. 전주 시민이라면 누구든지 원하는 시간에 방문해 음악, 미술 등 각종 문화활동을 즐길 수 있다. 1층 입구에 들어서자 전주시민놀이터를 이용하는 팀들의 스케줄이 빼곡히 들어찬 시간표가 눈에 띄었다. 건축 스터디, 밴드 연주 등 모임의 종류도 다양했다.

최근 이곳에선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한 직장인밴드가 시민들에게 저렴한 비용만 받고 악기를 대여해주기로 한 것이다. 전주동문예술거리추진단 이수영 기획팀장은 “악기를 구입할 형편이 안 돼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는 시민들에게는 좋은 기회”라며 “이들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시민들에게 무료로 음악 레슨을 해줄 계획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문화적 갈증 해소가 목표”

지난해 11월, 전주시는 전주 시민들의 문화향유 실태를 조사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문화예술 동호회가 1,223개에 달할 정도로 전주 시민들의 문화욕구는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임대료가 비싸 문화활동을 하고 싶어도 막상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이 팀장은 “시민들이 활발하게 문화예술 활동을 하려면 무엇보다 창작과 연습공간을 제공하고 시설과 장비를 빌려줘야 한다는 점을 알게 돼 시민들의 문화적 갈증을 해소해줄 수 있는 시민놀이터를 만들게 됐다”고 말했다.

전주시민놀이터는 3층 건물에 995평방미터(약 300평) 규모다. 1층엔 시민들이 세미나와 토론을 할 수 있는 ‘이야기 놀이터’, 2층엔 악기 연주를 위한 ‘소리 놀이터’, 3층엔 춤을 추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창작 놀이터’가 마련돼 있다. 대관 이용료는 3시간에 평당 2천원으로 저렴한 편이다.

이팀장은 “일상에서 자유롭게 문화활동을 즐기는 시민들이 늘어나게 되면 전주의 문화적 수준도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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