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중예술가! 표를 구입한 사람 앞에서만 공연한다

대한민국 트롯 역사에서 현재 활동을 중단한 상태지만 지금까지도 인기의 절정을 달리고 있는 독보적인 가수가 있다. 그를 가리켜 우리는 트롯의 황제 나훈아라고 말들한다. 감히 그 누구도 넘볼수없는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는 나훈아가 현재 경기도에 위치한 한 요양원에서 재활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23일 `연예해부 여기자 삼총사가 간다`는 나훈아가 경기도 한 요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여기자 삼총사`는 “나훈아가 양평의 실버타운 같은 요양원에 있다”고 전했다. 나훈아가 요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는 이유는 뇌경색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나훈아의 지인은 “나훈아가 양평의 실버타운 같은 비싼 요양원에 있다”고 말했다.

팬들이 너무나 궁금해하는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 과거 그 유명한 기자 회견을 하고 사실상 운둔 생활에 들어간지 벌써 5년이 지났다. 그의나이가 예순 일곱이기에 아직까지는 왕성한 활동할 수 있는 나이임에도 취재결과 나훈아가 현재 양평의 요양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거듭 밝히고 있는 것이다. 컴백을 위한 준비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는 일부 주장도 있기는 하지만 확실치 않다.

트롯황제의 루머는 늘 끊이지않고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훈아 과연 그는 누구인가?

중앙뉴스 뉴스팀은 전 국민들이 궁굼해하는 나훈아의 모든것을 여러가지 정황과 자료들을 토대로 심도있게 취재해 공개한다.

전설적인 트롯 황제의 탄생은 1947년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에서 무역상이었던 아버지와 평범한 전업 주부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시절 나훈아는 그 또래의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평범하고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고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고향 뒷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기타를 즐겨쳤다.

나훈아를 잘 알고있는 친구들은 유년시절의 나훈아는 악기를 잘 다루었다고 했다. 특히 피아노 실력이 수준급이었다는 것, 이후 나훈아는 고향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인 형을 따라 1965년에 서울로 상경하여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되지 않아 노래에 탁월한 끼와 실력을 갖춘 나훈아는 오아시스 레코드를 통해 1966년, 당시 19세의 나이로 1집 [천리길]을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나훈아의 대표적인 창법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수가 없었다. 간드러진 꺾기 창법이 바로 그것이다. 나훈아는 1968년부터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면서〈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시작으로〈강촌에 살고 싶네〉,〈님 그리워〉등 발표하는 곡마다 대중들로 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가지마오〉를 크게 히트시킨 19971년, KBS 음악대상을 수상하고 1972년에는〈고향역〉,〈머나먼 고향〉을 연달아 히트시키면서 본격적인 대중가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여기서 나훈아와 함께 대한민국 트롯역사를 만들어가는 또 한명의 가수가 등장한다. 당시 팝 스타일의 트로트로 사랑받던 가수가  남진 이었다. 둘은 항상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 냈다.

남진과 나훈아는 1970년대의 가요계를 장악하면서 한사람은 호남을 대표하고 나훈아는 영남을 대표하는 그야말로 트롯의 양대 산맥이었다. 이들의 경쟁은 트롯을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왕에는 늘 남진 아니면 나훈아가 차지했다.

기록으로 보면 남진이 거의 대부분 가수왕상을 수상하였고 나훈아는 2위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시절, 어느 가수라도 폭발적인 인기몰이를 하고있던  남진과 나훈아를 상대 할 수 있는 가수는 없었다. 남진은 전라도를 대표해 박진감 넘치는 빠른 템포 스타일의 트로트를 자주 불렀고 반대로 나훈아는 경상도를 대표해 감미롭고 서정적인 정통 트로트를 자주 불렀기 때문에 서로 다른 차이점으로 대중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기에 충분했다.

나훈아는 남진과 달리 대부분 차분하면서도 조용한 노래를 선곡하였다. 다양한 포즈와 꺾기 창법으로 트로트를 맛깔나게 부르는 나훈아는 중년층들에게  폭팔적인 인기를 누리기에 충분 했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의 연회에 참석할 것을 초청받은 나훈아는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사는 사람들에게만 노래를 한다며 단호히 거절했던 사건이다.
나훈아도 한때 시련을 맞는다. 전성기를 한창 누비고 있었던 나훈아는 1972년에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다. 나훈아가 공연중에 피습당해 몇 개월동안 입원을 해야한다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들은 나훈아의 팬들은 남진의 팬들이 나훈아를 다치게 했다는 루머를 듣고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

나훈아는 대한민국이 한창 경제부흥의 불씨가 일어나던 시기에 백마부대 명예정훈대위로 한달간 파월 위문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나훈아는 1973년, 공군에 자원입대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큰 화제를 불러 모으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계에서 최고의 주가를 달리던 여배우 김지미와 1976년에 결혼을 발표하며 국민이 충격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혼과 동시에 나훈아의 방송 출연이 점차 줄어들고 남진도 신군부의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자연스레 2인 체제가 사라졌다. 1977년에는 심수봉이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노래실력에 감탄한 나훈아는 심수봉을 가수로서의 데뷔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결혼과 동시에 나훈아는 방송에 좀처럼 출연하지 않고 잠잠했다. 1981년에 8집 [대동강 편지] 를 발표하면서 가요계에 복귀하기도 했다. 1989년에 본인이 직접 작곡하고 가사를 붙인〈무시로〉라는 노래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사실 나훈아는 일반 방송 프로그램에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나훈아의 공연장은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공연장을 찾지 못하는 일반인 들이 그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방송국에서다. 설과 추석 등 명절의 [나훈아 특집 쇼] 가 있기때문, 홍보와 마케팅에 집중하는 젊은 가수들은 위험할 수도 있는 뜸한 방송활동이라는 일종의 희소가치는 그의 단독공연에 관객들을 몰려들게 했고 한층 그의 존재감은 전설로 상승케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나훈아의 노래는 주로 서정적이면서 슬픈 로맨스틱한 곡들을 불렀는데 〈갈무리〉, 〈영영〉,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홍시〉라는 곡이 대표적이다. 다양한 스타일의 신인 가수들의 등장은 나훈아의 활동을 뜸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했지만 스스로 자신만이 갖고있는 색갈의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면서 대한한국의 대표가수로서 그 맥을 이어나가기에 충분 했다.

나훈아는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시대를 달리하는 끊임없는 히트곡 양산과 더불어 작곡과 작사 능력을 갖춘 대한민국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였다. 그것이 결구 1990년대 초 “대한민국 가요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게 되는 원인이다. 그의 기록도 대단하다.

데뷔 이후 현재까지 약 2,500곡을 취입하고 정규 19개를 포함한 200개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나훈아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는 약 100곡 이상 정도 추정하고 있다. 나훈아가 작곡과 작사를 했던 노래들을 살펴보면 대표적으로〈잡초〉, 〈사랑〉, 〈울긴 왜 울어〉, 〈무시로〉, 〈갈무리〉 , 〈영영〉 ,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 〈사내〉가 있으며 조미미의 〈사랑은 장난이 아니랍니다〉, 〈연락선〉 , 심수봉의 〈여자이니까〉, 이자연의 〈당신의 의미〉, 인순이의 〈잠깐〉, 강진의 〈땡벌〉이 있다.

절정을 이루던 전성기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음반 작업을 해오며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활동해오던 나훈아는 2008년 1월, 나훈아가 잠적하면서 일본의 야쿠자가 나훈아를 폭행했다는 등 각종 악성 루머가 퍼졌다. 이에 나훈아는 기자회견을 통해 루머가 사실무근이라고 적극 해명했다. 이때 벌어진 사건이 일명 바지 지퍼사건이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로는 콘서트, 공연, 등 더이상 무대에서 나훈아를 볼수가 없다.활동을 중단한 OFF 상태이다.

나훈아의 일화중에 1976년 7월 9일, 당시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던 톱 여배우 김지미와 결혼하여 사회적 이슈를 낳았다. 하지만 각종 루머에 휩쓸려 7년만에 이혼하였고 이혼 당시, 나훈아는 이 한마디를 남기면서 자신의 전재산을 몽땅 위자료로 김지미에게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 남자는 돈이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여자는 돈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이다. ”

또하나의 유명한 일화는 실제로 나훈아는 다른 트로트 가수들이 자주 초대를 받는 고위급 인사들의 파티에 단 한 번도 참석을 수락한 적이 없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보통 다른 가수들이 고위급 인사들의 파티에서 2~3곡을 부른후 3,000만원의 수고비를 받는다고 한다. 나훈아는 실제로 삼성의 초청을 받고 이건희 회장에게 이런 말을 하고 한 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했다는 것,

“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사람 앞에서만 공연을 한다. 내 공연을 보고 싶으면 당장 표를 끊어라. ”

이 에피소드는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에도 등장하며, 김용철은 이 일화를 얘기하며 나훈아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가 되었다고 한다.

나훈아의 근황 현재 나훈아의 근황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으나 최근 나훈아는 부인으로 부터 이혼 소송을 당했다. 서울고법 가사1부(이광만 부장판사)는 12일 정모씨가 나씨를 상대로 낸 이혼 및 재산분할 소송에서 원심과 같이 원고 패소 판결했다.재판부는 "피고에게 민법 840조 1, 2호의 이혼 사유가 있다거나 부부의 혼인 관계가 파탄됐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1983년 나씨와 결혼한 정씨는 1993년부터 자녀 교육 문제로 미국에서 생활하며 남편과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다가 2011년 8월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나씨는 그동안 이혼에 반대한다고 밝혀왔다.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 그는 40여년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트롯계의 전설이다. 그러나 2008년 기자회견 후 돌연 종적을 감춘것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건 나훈아에 대한 끊이지 않은 루머다.

온갖 루머들이 난무하고 있는 가운데, 아직까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나훈아! 팬들은 그의 아름다운 복귀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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