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책방송 KTV에서 다큐멘터리 ‘영웅들의 송가(頌歌)’ 3부작을 방영했다. 그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은 프로는 단연 켈로부대 이야기다. 켈로는 전설처럼 국민들에게 알려진 이름이다. 우선 켈로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 크게 돋보인 일이 없고, 무슨 일을 하였는지 자세한 내용을 모른다.

다만 6.25전쟁을 전후하여 바람처럼 나타났다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신출귀몰한 행적을 보인 특수부대였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안다. 따라서 켈로 출신이라고 하면 무시무시한 힘과 용기를 가지고 나라를 위해서 한 목숨 버리기를 서슴지 않는 용사라고 생각한다. 이 다큐멘터리는 켈로부대 창설에 처음부터 참여했고 고트대 대장으로 활동했던 최규봉의 증언을 중심으로 제작되었다.

최규봉은 아흔이 넘은 노병이다. 그가 20대 젊은이 때에 미24군단이 철수하면서 1947년 맥어더 사령부 산하에 창설된 첩보부대가 KLO다. 이들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북한 인민군과 중공의용군의 부대위치와 이동경로 등 주요 정보를 수집하여 UN군 작전수립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첩보업무는 후방에 앉아 있으면 아무 것도 얻어낼 것이 없다.

총을 들고 일선에서 싸우는 것은 한 사람의 병사역할로 끝난다. 그러나 정보를 수집하려면 적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필요하면 적 후방에 들어가 지원 병력과 군수물자의 규모와 이동경로까지도 샅샅이 알아내 알려주는 임무를 수행한다. 원칙적으로 은밀하게 움직여 자기노출을 하지 않게 되어 있지만 적들에게 발견되어 사살된 켈로대원이 무려 8000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은 첩보부대의 성격상 비밀에 붙여진 부대였기 때문에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군번, 계급 그리고 군적(軍籍)조차 없는 군인이었다. 비밀작전을 수행하며 성과를 드러내지 못하는 특수성 때문에 종전 이후 국군으로서의 참전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고 1994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비운의 군대였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전과는 6.25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엄청난 것이었다. 전쟁 초기 아무 준비도 없던 국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군의 탱크부대에 밀려 사흘 만에 서울을 비워주는 어처구니없는 후퇴를 거듭해야 했다. 정부는 부산에 피난 수도를 선포하고 대구 사수작전을 펴며 마지막 안간힘을 썼다. 부산이 함락되면 끝장이다.

국군은 유엔군과 더불어 필사적인 저항으로 북한군을 막아냈다. 다행히도 제공권을 장악한 유엔군 덕분에 낙동강 전선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이 때 총알받이나 다름없게 된 나이 어린 학도의용군과 재일학도의용군의 비장한 산화(散華)도 있었다. 특히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재일학생들의 참전이었다. 징병의무가 없는 그들이 조국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자 너도나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중동전쟁이 터졌을 때 미국에 사는 이스라엘 학생들이 비행장으로 몰려들었다는 애국심을 얘기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에 앞서 몇 십 년 전에 일본에 사는 한국학생들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들이 많다. 이들 재일학도의용병은 그 뒤 일본의 입국거부로 생활의 터전과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조국에 남아 불우한 생활을 이어간 이들이 많다.

6.25가 터졌을 때 서울대학교 전기공학과 1학년이었던 이창건은 켈로에 참여하여 기획참모를 맡는다. 그는 최규봉과 더불어 생사를 같이한 오랜 전우다. 전후 원자력 연구에 뛰어들어 한국의 원자력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자나 깨나 켈로맨이다. ‘KLO 한국전 비사’와 같은 묵직한 내용을 정리해서 책으로 묶었다.

거기에서 켈로의 인천상륙작전 비화도 소개된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은 교착상태에 빠진 전선에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서 인천상륙을 구상한다. 참모들은 군산을 건의했으나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작전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인천을 골랐다. 적의 허를 찌른 것이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팔미도 등대 점화가 필수다. 맥아더는 최규봉을 포함한 6명의 특공대원에게 작전명령을 내린다. 6명의 정예가 몰래 침투하여 팔미도 등대에 점화함으로서 261척의 상륙부대가 성공하는 것이다. 이로서 전쟁의 주도권은 국군과 유엔군이 쥐었고 북진을 거듭하여 평양을 탈환하고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갔으나 1950년 10월19일 중공군 참여로 처절한 전투가 이어진다.

동부전선 장진호전투는 중공군 7개 사단이 북진하던 미군을 공격하여 생존미군 385명, 카투사 전사자 875명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연출했지만 중공군 남하를 2주 저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3년을 끈 이 전쟁에서 미군과 중공군은 마지막 정전협정 체결을 앞두고 화천발전소가 있는 425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수력발전소를 확보하는 것은 남북경제의 바로미터가 되는 것이어서 이승만과 김일성이 경쟁적으로 탈환을 독려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6사단 공적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2013년 6월 1일 화천 발전소 탈환 승전 기념식에서 백선엽장군과 국가보훈처는 공동 발표문을 통해서 미9군단의 공적임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에는 최규봉이 장개석 밑에서 중공군으로 활동했던 한국인 오죽선을 중공군 깊숙이 침투시켜 확실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기에 화천수력발전소 탈환이 가능할 수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지금도 화천발전소에는 KLO전승비가 우뚝 서 조국을 지켜낸 영령들을 위로하는 상징으로 만천하를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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