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에서 실시되었던 비례대표자 순번결정 경선은 그 효력이 당내에 그치지 않고 막 바로 국민의 대변자로 선출되는 것이어서 단순한 당내경선이 아니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투표는 당의 규정에 의해서 실시되었지만, 그 결과에 따라 국회의원에 당선하기도 하고 못 할 수도 있는 아주 중대한 투표였던 것이다. 따라서 통진당 경선은 당내규정에 의해서 행해지긴 했지만 공직선거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모든 법규를 엄격하게 지켜야만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인 입장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진당 당권을 쥐고 있는 측에서는 전자투표를 악용하여 본인의 승낙을 받은 ‘대리투표’를 공공연하게 실행했다.

대리투표는 본인이 투표장에 나올 수 없을 때 다른 사람을 시켜 대리로 투표하게 하는 행위인데 우리나라는 헌법에 명백하게 ‘직접선거’로 못 박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명색이 선거를 실시하는 어떤 나라도 대리투표를 인정하는 규정은 두지 않고 있다.

심지어 찬반방식을 흑백으로 나눠 흰 통과 검은 통에 투표하게 하는 공산당 식 투표도 대리투표를 허용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다. 3.15부정선거로 무너진 자유당정권은 3인조, 5인조, 9인조 등으로 서로 투표지를 보여주는 공개투표, 기권이 예상되는 유권자의 예상비율에 따른 사전 투표지 투입을 강행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대리투표’를 행했다.

이 때 강행된 대리투표는 동네 이장이나 반장이 책임지고 했다. 그들은 노약자로 투표장에 나올 수 없는 사람, 타지에 출장 간사람 등 기권이 예상되는 사람들의 실태를 잘 알고 있어 그 투표지를 이용하여 몇 차례씩 들락거리며 대리투표를 행했다.

무소불위의 관권선거였기에 가능했다. 이번 통진당 경선투표도 철저히 당권을 쥔 측에서 주관하는 것이어서 사이버 대리투표가 공공연하게 묵인 실시된 ‘당권선거’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행위가 부정불법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문제가 불거지자 오리발을 내밀며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내부 폭로자의 확실한 증거제시로 대리투표는 만천하에 사실로 밝혀졌다.

검찰은 이들을 무더기로 기소했다. 당연히 유죄판결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실제로 부산, 대구, 수원 등 6개 지방법원에서는 이들 대리투표자들에 대해서 벌금형으로 유죄를 인정했다. 그런데 서울 중앙 지방법원 형사35부(재판장 송경근)는 45명의 피고인에게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사실관계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통진당 경선규정에 대리투표를 하지 말라는 규정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논리도 있을까. 초등학교 반장선거도 그런 규정이 없지만 당연히 비밀, 직접선거를 실시한다. 선거에서 비밀 직접선거 등 4대원칙은 다툴 필요도 없는 원칙이요 진실이다. 이를 외면한 이번 판결은 한마디로 해괴하다.

이들을 처벌하려면 죄형법정주의에 입각하여 명문규정이 있어야 한다는 논리를 폈지만 통진당 당내경선이 궁극적으로 국회의원 선출로 이어진다는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어째서 눈을 감았는가. 당내에서 당직자를 선출하는 투표에서도 대리투표는 원천적으로 무효 처리되는 게 지금까지의 관행이다.

선거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한한 투쟁을 전개해 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자유당 말기 자유당 정권은 역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앞서 살핀바와 같이 대리투표도 그 중의 한 양상으로 실행되었다. 학생과 시민 그리고 야당이 한데 뭉쳐 이에 대항한 것이 4.19혁명으로 승화되었다.

프랑스나 영국의 혁명은 대부분 왕권의 남발과 혹독한 가렴주구에 대한 국민의 저항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4.19혁명은 기본적인 투표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절규였다. 역사상 최초의 올바른 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혁명이었던 것이다.

세계가 부러워했던 학생들의 궐기에 대해서 자유당 정권은 발포명령을 내려 무려 186명의 사망 희생자가 발생했고 부상자만 6500명에 이르렀다. 4.19는 자유 민주 정의를 외치며 이승만을 몰아냈다. 이어서 실시된 공정선거로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이처럼 빛나는 투쟁으로 얻어낸 ‘민주원칙’이 비밀 직접선거인데 이를 판결문 한 장이 휴지조각으로 만들고 있다.

그따위 판결을 재판의 이름으로 행한 사법부도 한심하지만 민주화를 이룩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국민은 허탈감에 빠져 있다. 이런 부끄러운 판결문을 읽어야 하는 국민은 오직 부끄러울 뿐이다. 더구나 그 판결문은 ‘통상적인 수준의 대리투표는 선거제도의 본질적 기능을 침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묘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통진당의 대리투표는 자기네 측근을 당선시키기 위한 ‘비상수단’으로서의 대리투표였지 ‘통상적 대리투표’란 이 세상에 없다. 논리의 궤적을 무죄로 끌어드리기 위한 견강부회의 논법이다. 어리석다면 무지막지한 판결이고, 지혜롭다면 오만방자한 편견으로 가득 찼다. 이런 꼴을 보려고 우리는 목숨을 내건 투쟁을 해왔단 말인가. 4.19는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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