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4.19혁명 54주년이 다가온다. 반세기에 이르는 기나긴 세월 속에서 4.19는 영예와 폄훼가 거듭되었다. 자유당정권의 단말마적인 정권유지를 위한 총탄세례로 185명이 참혹하게 죽고 6000여 명이 부상당한 쓰라림 속에서도 자유를 외치는 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했다.

교수데모를 끝으로 경무대에서 하야한 이승만이 이화장으로 돌아갈 때 일체의 보복행위를 스스로 막았다. 혁명의 주체인 학생들은 정권을 잡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사회혼란을 방지하기 위한 질서유지에 골몰했다.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도 용인했다.

그리고 야당인 민주당이 내각책임제로 개헌한 후 새로운 정권을 출범시키는 것을 조용히 지켜봤다. 민주당은 국민의 여망을 외면한 채 신구파로 분열하여 손가락질을 받았다. 가까스로 총리에 오른 장면(張勉)은 혁명 뒤에 불어 닥친 각계각층의 요구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휩쓸리며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파고든 사람이 박정희 군부다.

그들은 치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4.19혁명 제1주년 기념이 끝나자마자 군대를 몰아 서울을 점령했다. 5.16쿠데타다. 대통령 윤보선은 “올 것이 왔다”고 했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장총리는 수녀원으로 숨어들어 닷새 동안 연락두절 상태가 되었다. 초기 진압의 기회를 놓친 민주당 정권은 내각책임제 정권을 손에 쥐어줬어도 1년도 지탱하지 못했다.

자유당을 내쫓고 자유 정의 민주를 내세운 새로운 정권을 창출한 ‘4.19혁명’의 영화(榮華)는 여기서 끝을 맺고 이제는 쿠데타군이 명명한 ‘4.19의거’로 전락하여 하염없는 폄훼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이승만정권은 12년간 국부(國父)로 군림하며 영구집권을 노리고 사사오입개헌, 발췌개헌, 정치파동 등 무소불위의 경찰 헌병정치를 자행해 왔다. 가톨릭의 입김이 강했던 경향신문을 폐간시키는 등 언론에 재갈을 물렸다. 그래도 동아일보를 비롯한 월간 사상계 등은 끈질기게 이승만 독재를 비판하며 국민의 저항정신을 북돋아줬다.

야당인 민주당은 이승만에 대항하여 신익희 조병옥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웠으나 4년을 터울로 두 후보가 모두 선거직전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이제는 대통령 유고시 승계할 수 있는 부통령선거에 관심이 쏠렸고 자유당은 이기붕을 후보로 내세워 치밀한 부정선거 계획을 확정했다. 그것이 3.15부정선거다.

내무장관 최인규는 이를 총지휘하면서 경찰력과 전체 공무원을 하수인으로 한 3인조, 5인조, 9인조 등 철저한 동원 체제를 프로그래밍 했다. 40% 사전투표, 군인들의 영내 공개투표는 기본이었다. 이에 저항한 마산시민들의 궐기에 총탄을 퍼부어 7명이 사망했으며 최루탄을 눈에 맞은 김주열의 시신은 아예 마산 앞바다에 던져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4월11일 김주열 시신이 바다에서 떠오르자 전 국민이 분개하여 방방곡곡에서 데모가 터졌다.

4.4 전북대 데모, 4.18 고대데모는 대학생이 궐기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특히 고대생들은 귀교 중 깡패들의 습격으로 1백여 명이 피투성이가 되는 참상을 빚었다. 드디어 4월19일 이름하여 ‘피의 화요일’이다. 전국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일제히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대통령 집무실 경무대(현 청와대)로 몰려간 동국대를 비롯한 수많은 학생들이 길가에 쌓여있는 수도관을 밀며 총탄을 피하는 현장사진은 동아일보 이명동과 조선일보 정범태가 생생하게 촬영하여 잔인했던 그 날의 정경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 날 시작한 이승만정권과 국민의 싸움은 1주일 계속되었다.

대통령이 발포명령을 내리지는 않았겠지만 대통령으로서 국정 최고 책임자인 그가 최후의 책임자로 기록되는 것만은 어떤 변명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허물이다. 경찰의 발포로 전국에서 숨지거나 다친 학생 시민의 숫자는 앞에서 밝힌 바와 같다. 광화문 네거리는 이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승만은 최후의 저항으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육군참모총장 송요찬은 탱크로 진주하여 서울거리를 누볐으나 일체의 발포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데모대들은 탱크 위로 기어 올라가 군인들과 함께 손을 맞잡았다. 이 덕분에 일시적이었지만 송요찬의 인기는 요즘 ‘별 그대’나 비슷할 정도였다.

이승만을 하야하게 만든 결정적 계기는 4월25일 교수데모에서 모멘텀을 찾을 수 있다.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 “이승만은 하야하라!”는 프래카드를 든 노교수들이 가장 앞에 선 교수데모대가 거리에 나서자 모든 국민들이 따랐다. 격렬한 구호도 필요 없었다.

그들의 주장이 옳고 시대감각에 정확하게 호응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역사의식을 운위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다.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들이 사랑하는 학생들의 고귀한 정신과 피를 거둬드리기 위해서 생명을 건 투쟁일선에 나선 것이다. 이 숙연함은 모두를 감동시켰다. 경찰도, 군인도, 국민도, 학생도 선생님들의 희생적인 궐기 앞에 모두 머리를 숙였다.

이승만은 더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하야성명을 발표한다. 후계자를 자처하던 이기붕일가는 권총자살로 처참한 일생을 마감한다. 4.19혁명은 영원한 민족유산이다. 새삼스럽게 이승만 추종세력들의 움직임이 보이지만 그들도 먼 훗날 역사의 심판에 맡기고 조용히 물러가기를 바란다.

전대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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