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을 등지고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유구한 세월 찬란한 상아탑으로 빛나는 학교가 동국대학교다. 원래 불교전문학원으로 출발하여 이제는 손꼽히는 종합대학으로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서울에 둥지를 틀고 있는 대학 중에서는 시내 한 복판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산다. 특히 남산 산책길과 바로 통하는 통로까지 마련되어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한다.

이 대학은 다른 사학과 달리 불교 조계종이 재단을 이뤄 비교적 안정적인 학교운영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오랜 전통을 가진 학교여서 동문들의 사회적 진출도 눈부시다. 한 때 동국대 출신 국회의원들이 야당의 양대 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상도동계와 동교동계의 핵심들이라고 해서 시중의 화제꺼리가 되기도 했다. 교정으로 오르는 가파른 길을 걷다보면 만해 한용운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3.1만세운동의 불교계 대표로서 일화가 많다.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에게 군더더기 일색이라고 일침을 가하고 손수 붓을 들어 강경한 ‘공약 삼장’을 추가한 기개는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만해선생 같은 열정과 애국심을 후학들이 본받아 국가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언제나 앞장선 이들이 나타났으니 이번에 세워진 노희두 흉상이 이를 웅변으로 증명한다.

노희두 이름석자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는 50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모교 교정에 다시 나타났다. 50년 만에 다시 본 모교는 어떤 모습으로 그에게 비춰질까. 학생도 많아지고 교사(校舍)도 멋지다. 4월이 되면 아름다운 꽃들이 시샘하며 피어나는 광경도 보기 힘들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놀라지 않을까. 가난한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충남 서천에서 서울의 명문 동국대 법학과에 입학했다는 것만으로도 개천에 용 난일일 수도 있다. 그가 법과를 택한 것은 아마도 부정과 부패를 용납하지 않고 정의의 사회를 구축하겠다는 파사현정의 정신이 살아 있어서일 게다.

58학번인 노희두는 광복이 된 다음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감성이 예민했던 중고교 사춘기시절에 자유당독재의 단말마적인 행태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법을 공부하여 이 나라에 제대로 된 정의의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법치의 꿈을 안고 그는 법학을 전공했고 유명교수들의 강의에 심취하여 더욱 의지를 굳혔다. 도서관에 틀어박혀 육법전서와 시름하다가도 문뜩 빗나가고 있는 사회실상에 울분을 되새김 질 해야 했다.

이승만정권은 온갖 야료를 다 부리며 국민들을 갈취하고 탄압했다. 민족상잔의 6.25를 겪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사사오입 개헌, 정치파동, 보안법 파동을 연출하여 민심과 등졌다. 가뜩이나 기대했던 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와 조병옥이 4년의 시차를 두고 잇달아 선거직전에 사망하는 불행한 사태가 이어졌다. 국민들의 실망과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승만의 후계자로 지목된 이기붕은 무소불위의 권력놀음으로 야당과 국민을 짓밟고 우롱했다.

정상적인 선거를 치르면 백전백패가 분명하다는 사실을 직시한 그들은 음흉한 흉계를 꾸며 부정선거를 획책하기에 이른다. 금권은 양념이었고 철저한 관권선거를 노렸다. 모든 공무원은 한낱 자유당정권의 노예에 불과했다. 까라면 깔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군대조직도 마찬가지였다. 윗사람 눈치 보기에 바쁜 지휘관들은 폐쇄적인 영내선거에서 공공연하게 공개투표를 자행하게 만들었다.

이기붕일파의 부정선거 시도는 삼척동자도 알만큼 공공연했기 때문에 야당과 언론에서는 끊임없이 저항했다. 그러나 마이동풍. 한번 부정의 늪에 빠져 그 단맛을 보기만하면 나중에야 삼수갑산을 갈망정 목을 내놓고 기를 쓰는 법이다. 관성의 법칙은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미 팔십을 넘긴 이승만이 임기 중에 사망하면 부통령이 승계한다는 계산으로 이기붕은 부정선거에 몰두한다.

그들은 야당집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고등학생들을 일요일에 등교시켰다가 2.28대구 고등학생들의 궐기를 자초하고 3.15부정을 규탄하는 마산궐기를 총탄으로 막다가 김주열 사건을 빚어낸다. 그리고 드디어 대학생들이 일어나 4.4 전북대시위, 4.18 고려대시위로 이어진다. 고대시위는 깡패들을 시켜 무자비하게 짓밟아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다. 분노에 떨던 대학생들이 일제히 궐기한 것이 4.19다.

혁명의 장엄한 막이 올랐다. 그 한가운데 노희두가 섰다. 동국대생들은 권력의 상징 경무대로 향했다. 경찰은 실탄을 발사했고 첫 번째 희생자가 노희두다. 그의 몸은 금세 피투성이로 변했다. 학우들은 그를 들춰 업고 콩 볶듯 쏘아대는 총탄을 뚫고 병원으로 옮겼으나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아! 아! 장엄한 죽음이여! 노희두를 50년 동안 한시도 잊을 수 없던 박영식과 김칠봉 등 동국대 4.19혁명계승자회 동지들이 서둘러 그의 꿈과 희망이 서린 모교 교정에 우뚝 세웠다. 살아 있다면 나의 친구가 되었을 그를 부활시킨 동지들의 뜻이 너무나 감격스럽다. 노희두여! 너는 뜻을 남기고 후배들과 영원히 사는구나! 영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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