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신주영기자]올해 금융권 인수·합병(M&A) 시장의 대어로 꼽혔던 현대증권 매각 작업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유력 후보로 거론되던 범현대가(家)가 발을 빼면서 흥행 열기가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매각 주관사인 산업은행은 "매각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어서 연내 매각이 물 건너가는 게 아니냐는 관측마저 나온다.


▲속도 못내는 매각작업…연내 매각 어려울 수도
12일 금융권과 재계에 따르면 현대증권 인수의향서(LOI) 제출 마감인 지난달 30일 LOI를 낸 곳은 일본계 금융기업 오릭스, 파인스트리트, 현대증권의 2대 주주인 자베즈파트너스 등 사모펀드(PEF) 3곳과 DGB금융지주 등 총 4곳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DGB금융지주는 분리매각을 전제로 현대증권이 보유한 현대자산운용 인수에만 관심이 있다고 밝힌 상태다.

범현대가로서 인수전에 참가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현대자동차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 등은 LOI를 제출하지 않았다.

현대증권을 인수할 후보가 사모펀드 3곳으로 사실상 압축되면서 흥행에 김이 빠지자 산업은행은 아직 매각 일정조차 잡지 않고 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정해진 매각 일정이나 방식은 없다"며 "인수의향서를 낸 곳이 실제 인수 의향이 있는지를 점검하고, 분리매각 등을 포함해 어떤 방식이 유리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인수의향과 능력이 뚜렷한 다른 잠재적 투자가 있다면 언제든지 문은 열려있다"며 "현대증권에 대한 실사가 진행되기 전까지 인수의향서를 내면 된다"고 덧붙였다.

산업은행은 인수후보자가 많아 매도자 우위로 M&A가 전개되면 매각 일정이 빨리 진행되겠지만, 현재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 만큼 굳이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선 유력후보들의 불참으로 현대증권의 매각 가격이 낮아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대그룹은 애초 현대증권과 현대자산운용, 현대저축은행 등 금융계열사 3곳을 매각해 7천억∼1조원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6천억원 안팎에 그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현대증권은 발빼나?

범현대가는 산업은행의 러브콜에도 "관심없다"는 일관된 입장을 밝히고 있다.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그룹 내 이미 HMC투자증권이 있는데 굳이 현대증권을 살 필요가 있겠느냐"며 "인수전에 뛰어드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현대중공업도 "관심없으며 인수를 검토한 바 없다는 게 공식 입장"이라고 밝혔다.

그런데도 범현대가, 특히 현대차그룹의 인수전 참여 가능성이 계속 제기되는 이유는 현대증권과의 인연 때문이다.

현대차는 1998년까지 현대증권의 최대주주였다. 이후 현대상선으로 최대주주가 변경됐고, 2000년 현대차가 현대그룹에서 분리되면서 현대증권은 현대그룹에 남았다.

현대증권은 무엇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선친인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 벌여놓은 사업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정선섭 재벌닷컴 대표는 "고 정주영 회장이 일궈놓은 현대증권을 다른 곳에 넘기는 것을 현대가(家) 사람들이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라며 "막판에라도 인수전에 뛰어들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고 전망했다.

현대차그룹은 2008년 신흥증권을 인수해 사명에 '현대'(현대IB증권→현대차IB증권)를 넣었다가 현대그룹의 반대에 부딪혀 포기한 적이 있다. '현대'라는 명칭이 갖는 상징성을 고려할 때 현대차그룹이 현대증권을 포기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현대차는 2010년에도 '모태' 기업인 현대건설을 두고 현대그룹과 경쟁해 법정 소송까지 가는 '난타전'을 벌인 끝에 인수에 성공한 바 있다. 현대차는 당시에도 줄곧 "인수의사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가 인수전이 시작되자마자 뛰어들었다.

증권업계에선 현대증권과 HMC투자증권과 합병할 경우 자산 25조원 수준의 업계 최대 규모 증권사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현대차가 현대증권 인수 매력을 느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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