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되면 ‘현충의 달’이 시작되고 6일 현충일을 정점으로 전국의 국립현충원과 호국원은 유족을 비롯한 추모국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릴 수 있었던 선열들의 발자취를 찾아 만분의 일이나마 먼저 가신 분들을 추모한다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들의 의무요 책무이기도 하다.

3월에는 마산 3.15민주묘지, 4월에는 수유리 4.19민주묘지에서 독재와 싸우다 희생된 185위를 추도하는 행사가 거행된다. 5월에는 광주 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도식이 정부주최로 거행되지만 금년에는 지정곡 여부를 둘러싼 갈등으로 두 군데서 따로 열리는 파행이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 무에 그렇게 대단스러운 것이라고 국회에서도 인정했으면 부르면 됐지 굳이 부르지 못하게 한 국가보훈처의 처사는 가뜩이나 세월호 사건으로 침울해진 국민들의 마음만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국립묘지를 내 생애 한번만이라도 꼭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의외로 많은 듯하다. 그러면서도 막상 혼자 나서기는 쉽지 않은 게 우리네 인생살이다. 맘은 굴뚝같으면서도 성큼 나서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하여 6월산행의 목적지를 동작동 국립 현충원으로 결정한 것은 모든 회원들의 묵언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주고 36회 산악회 행사다.

나 자신 현충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대부분 공적으로 참석하여 현충탑 참배만 끝나면 휑하고 차를 타고 떠버리는 일을 반복했던 터라 사실 국립 현충원에 모셔진 수많은 애국 열사들과 호국영령들을 제대로 추모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미흡한 마음이 서려 있었다. 이번 기회에 세 분의 대통령 묘소, 임시정부 요인, 정부요인, 장군묘역, 경찰묘역 그리고 무명용사묘역 등을 모두 참배하기로 마음먹고 6월15일 아침 일찍 모였다.

27명의 회원들은 모두 등산복 간편 차림으로 더운 날씨에 대비했지만 박병훈은 6.25 때 전사한 우리의 선배인 전고24회 박병조 큰형의 영전에 바칠 조화까지 준비해왔다. 현충원 참배의 절차는 따로 정해진 것은 없다고 해도 단체로 간 것이니까 우선 현충탑 참배가 먼저다.

그 다음 지하 영현실을 찾는다. 지하 영현실은 그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그냥 스치고 지나가기 마련인데 그 곳은 수만 개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6.25 등 전쟁에서 실종되어 전사한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되는 분들의 위패를 모셨는데 북한에서 탈출한 국군포로들은 귀국하여 자신의 위패를 어루만지며 만감을 교차하기도 한다. 조창현소위의 위패도 여기에 있었다.

우리가 다음에 찾은 곳은 채명신장군의 묘소다. 베트남 참전용사들과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겨 장군묘역에 가지 않고 병사들과 똑같은 비석을 세워 모셨다. 그러나 맨 앞자리에 혼자 누워있어 만병을 지휘하던 생전의 그 모습을 빼닮았다. 일행은 이제 산길로 향한다. 산길이래야 잘 포장된 길이지만 쏟아 붓는 뙤약볕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겁다.

땀을 뻘뻘 흘리며 임시정부요인들을 만난다.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장군, 국회부의장 김재광의원 등 당대의 정치가 외교관 애국자들의 낯익은 이름들이 비석에 아로 새겨져 그들의 애국충정을 조금이나마 되돌아보게 만든다.

국군들과 함께 지리산 토벌대 등으로 활약했던 경찰묘역은 따로 건립되어 있어 구별하기도 쉽다. 세월호 등 국가를 위해서 자기의 몸을 던진 의사자들의 영현은 아마 대전현충원에 모셔질 것으로 생각되지만 의사자들의 묘역은 따로 조성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혼자서 생각해 본다.

맨 꼭대기 길가에 설치된 약수터는 맛 좋기로 소문났기에 너도나도 목마름을 가셔본다. 시원한 물 한 사발이 가슴을 적시며 내려가는 기분이 피로를 잊게 한다. 맨 처음 찾은 박정희 대통령묘소는 공교롭게도 약수터와 가까운 곳이다.

나는 준비했던 소주 한 병을 꺼내어 헌작한 후 전원 5열종대로 도열했다. 경례와 묵념으로 추도의 뜻을 표했지만 경비원이 큰 소리로 술을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제지하지는 않는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삼선개헌과 유신선포로 18년의 독재 장기집권을 했지만 경제정책의 성공으로 지금은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 추앙되고 있다. 따랐던 술로 돌려가면서 음복한 후 두 번째로 찾은 곳은 김대중 대통령묘소다.

원래 동작동에는 자리가 없어 대전 현충원으로 모시기로 되어있었는데 유족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현재의 좁은 자리라도 상관없다는 양해 하에 이 곳에 모신 것이다. 민주화운동의 선두에서 싸웠던 고된 투쟁의 상징으로 아직까지도 가장 많은 이들이 회고하며 찾는 분이다.

내려오는 길에 찾은 이승만 대통령묘소는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위세를 그대로 보여주지만 독립운동의 공로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를 저질러 4.19혁명으로 쫓겨나 하와이에 망명한 후 생을 마쳐야 했던 불행한 대통령이다.

요즘  건국 대통령으로 추켜세우는 잘못된 역사관을 가진 이들이 오히려 그의 명예를 더럽히는 역할을 하고 있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찾은 이는 우리들의 동창생인 백남강(白南江)이다. 육군중위로 육군정보기 조종사였던 그가 순직하여 현충원에 있을 것이라고 양성일이 귀띔하여 49년 만에 찾았다.

순직직전 국군통합병원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이 선하다. 참으로 오래 못 봤던 친구의 무덤에 한 잔 술을 부어놓고 가슴으로 통곡한다. 삼가 모든 애국선열과 호국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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