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호 국민은행장.    

[중앙뉴스=신주영기자]23일 국민은행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한국IBM을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기로 의결하면서 앞으로 경영 파국이 우려된다.

국민은행이 한국IBM을 공정위에 신고한 사실만으로 IBM은 향후 국민은행이 발주하는 전산 관련 입찰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민은행 경영진은 유닉스 시스템은 물론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까지 선택 범주에 포함해 전산 교체 프로젝트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이건호 행장 리더십 손상



사외이사들의 이번 결정 강행으로 이건호 행장 측은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게 됐다.


리더십의 손상은 앞으로 국민은행의 경영활동이 파행으로 치달을 수 있음을 예고한다.

다음번에도 사외이사들이 경영진을 배제한 채 경영 안건 추진을 강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민은행 이사회 갈등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자체 진화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건호 행장이 지난 27일 사외이사들과 함께 간담회를 열어 접점을 좁히려는 노력을 했지만 갈등은 악화 일로에 접어들게 된 셈이다.

국민은행 노조의 압박도 거세질 전망이다.

국민은행 노조는 이건호 행장과 정병기 감사를 제외한 나머지 이사진 8명을 업무상 배임과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고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로 했다.

또 해당 이사진 8명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과 4월 24일 유닉스 전환을 승인한 이사회 의결에 대해서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낼 예정이다.

국민은행 이사회 내분 사태는 금융당국의 제재가 확정되고 최고 경영진의 거취가 결정된 후에야 해결의 가닥을 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당국은 전산시스템 갈등 등과 관련해 임영록 KB금융지주 회장과 이건호 행장 양측에 중징계를 사전 통보한 상태다.

은행 관계자는 "26일 이후 제재 결과가 확정된 이후에야 어떻게든 사태가 매듭지어질 것"이라며 "그 이전까지는 경영 파행이 일정 부문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KB금융 최고경영진에 대한 제재 결과를 확정 짓고 이들의 거취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전산 교체를 둘러싼 이사회 갈등도 매듭짓기 어려울 전망이다.

▲사외이사가 경영진 배제하고 안건 준비

이날 사외이사들의 행보는 통상적인 이사회 의결 관행에 비춰 극히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사외이사는 경영진에서 검토한 안건을 두고 찬반 의사표시와 의견 개진을 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정부 통제를 받는 공기업 등에서 사외이사들이 주도해 경영진을 몰아내는 극단적인 사태가 발생한 사례도 있지만, 특정 경영 사안을 두고 사외이사들이 방향을 직접 결정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금융권 관계자는 "현행법 체계에서 사외이사들이 주도적으로 경영 안건을 발의하는 것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통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 이날 이사회 개최 직전까지 은행 경영진은 이사회 안건 제목만을 통보받았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 관계자는 "이사회 제목만 알려졌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사외이사들이 직접 준비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법무실 '신고 불가' 결론에도 의결 강행

국민은행 법무실에서는 사외이사들의 한국IBM 공정위 신고 안건에 대해 '공정위 신고 대상이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IBM과의 현 메인프레임 사용 계약이 끝나는 내년 7월 이후 시스템을 계속 유지할 때 계약서에 명시한 대로 할증사용료를 지불하는 것이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이나 불공정 거래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법무실은 또 은행이 공정위 신고를 강행할 경우 한국IBM 측으로부터 명예훼손과 같은 민형사상 책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은행 법무담당 관계자는 "은행 내부적으로는 공정위 신고 대상이 안 된다는 결론을 냈다"고 전했다.

사외이사들은 별도로 법률자문을 구해 위법 사유에 해당한다는 답변을 얻고 신고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사외이사인 강희복 시장경제연구원 상임이사는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나 "2010년 유럽연합(EU)에서도 IBM을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로 시정한 사례가 있다"며 "IBM은 시장을 혼란시킨 점에 대해 공정위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인정받으려면 해당 회사의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거나 매출액 상위 3개사의 점유율이 75% 이상이어야 한다.

한 공정거래법 전문 변호사는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 행위의 경우 시장 획정이 가장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현재 주요 시중은행 가운데 IBM 메인프레임 시스템을 사용 중인 곳은 우리은행과 기업은행, 외국계인 한국씨티은행과, 한국SC은행 등으로 많지 않다. 유닉스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결정한 기업은행을 빼면 3곳이다.

하지만 메인프레임 시스템만을 별개 시장으로 할 경우 IBM의 점유율은 독점에 가깝다.

글로벌 은행이 대부분 IBM 메인프레임을 고수하고 있어 세계시장에서는 IBM의 점유율이 높은 편이다.

막상 시장지배적 사업자로 인정된다 하더라도 남용행위를 입증하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법무실의 반대 의견에도 공정 신고를 강행한 것은 실제 한국IBM 행위의 위법성 판단과 그에 따른 손실 보상보다도 다른 의도가 개입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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