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윤지현 기자] 피살된 재력가 송모(67)씨의 급전출납 장부 '매일기록부'에서 일부 내용이 수정액으로 지워진 사실이 드러나면서 송씨의 정·관계 로비 의혹이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 수천억원대 자산을 지닌 재력가  송 모씨를 살해하도록 사주한 혐의로 구속된 김형식 서울시의회 의원이 지난 3일 서울 강서구 강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지워진 내용 가운데는 현직 검사를 뛰어넘는, 지금까지 언급된 적이 없는 '급'의 인물이 있을 수 있어 수사 확대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16일 서울남부지검에 따르면 송씨의 아들은 장부 내용 일부를 수정액으로 지우고 장부 끝에 붙어 있던 별지를 폐기한 뒤 검찰에 제출했다.

검찰은 제출받은 장부가 '원본이자 전부'라는 송씨 유족의 말을 믿었지만 원본도, 전부도 아니었던 셈이다.

검찰에 따르면 송씨 아들은 장부 본문에서  모두 23곳을 지웠다.

송씨 아들은 또 돈의 용처를 함께 기재해 A 검사만 따로 정리해 붙여놓은 별지 2∼3장을 폐기했다.

이러한 사실은 경찰이 뒤늦게 제출한 장부와 별지 사본을 검찰이 갖고 있던 장부와 비교해본 뒤에야 드러났다.

이 사본은 송씨 아들이 수정액으로 지우기 전 경찰이 확보해놓은 것이어서 A 검사 이름과 돈이 건네졌다고 기록된 내역 전부가 그대로 남아 있다.

앞서 서울남부지검은 전날 김형식(44) 서울시의회 의원의 살인교사 의혹 사건의 피해자인 송씨의 '매일기록부'에 정 검사의 이름이 10여차례 등장했다고 밝혔다.

검찰 조사 결과 장부에는 숨진 송씨가 2005년부터 2011년까지 10차례에 걸쳐 1천780만원을 정 검사에게 건넨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초 남부지검은 정 검사가 200만원을 한 차례 받았다고 했지만, 다시 두 차례에 걸쳐 300만원으로 말을 바꿨다가 이번에 다시 정정 발표를 했다. 이에 정 검사에 대한 혐의를 축소하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김진태 검찰총장은 이날 대검찰청 감찰본부에서 정 검사를 직접 수사하라고 지시했으며, 정 검사에게는 직무정지 조치가 내려졌다.

특별히 대검찰청 공안부에서 일부러 파견한 내란음모사건 수사팀의 핵심 인물인 정 검사가 직무에서 배제된 것을 보고, 피살된 재력가 송모씨의 장부에 정 검사의 이름이 올라 대검 감찰본부의 수사선에 올랐기 때문이란 말이 돌고 있다.

한편 검찰은 송씨 유족이 정 검사의 부탁을 받고 이름을 지웠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수사할 방침이다.

지워진 대상은 주로 공무원이거나 송씨의 사생활 관련 인물이라고 검찰은 전했다.

송씨 아들은 검찰 조사에서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 이름이 있어 피해가 갈까 봐 자발적으로 지웠다"고 진술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지워진 공무원은 장부에 이름이 오른 사실이 드러났을 때 타격이 클 고위직이거나, 건네진 돈의 액수가 큰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모두 로비 의혹을 수사하는 검·경이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검찰은 일단 지워진 23곳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모두 확인했다.

그러나 송씨 아들이 지운 곳 외에 송씨가 생전에 직접 지웠거나, 지운 뒤 그 위에 덧칠한 부분도 많아 검찰이 계속 확인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밖에 원래 더 많은 별지가 붙어 있던 것을 송씨 아들이 폐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송씨가 본문에 금전 출납내용을 정리하는 동시에 중요 인물이나 내용인 경우에는 별지에 따로 정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장부에 등장한 인물은 현직 국회의원을 비롯해 전·현직 시·구의원, 검찰·경찰·법원·세무·소방 공무원 등 정관계 인사들이 다수인 것으로 파악됐다.

장부에는 또 살인교사 혐의로 구속된 김형식 서울시의원이 송씨로부터 받은 것으로 기록된 5억2천만원 가운데 2억원에 대해 김 의원이 2010년말 '서울시장에게 준다고 가져갔다'고 적혀있다.

본문에서 지워진 내용과 사라진 별지 원본을 확인하게 되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인물이 거론되거나 이들에게 건네진 돈의 액수가 달라질 소지가 다분하다.

검찰은 14일 밤부터 송씨 아들을 계속 불러 장부를 훼손한 정확한 동기와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송씨 아들에게 구체적인 혐의가 적용될지는 법리검토를 거쳐 결정될 전망이다.

지금까지는 송씨 아들의 단독 행동으로 파악됐지만, 장부에 대한 검·경 수사가 시작되자 A 검사를 비롯한 당사자들이 송씨 아들에게 이름을 지워달라고 부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정황이 드러날 경우 송씨 아들과 공무원들의 증거인멸 모의 개연성에 대한 수사 확대가 불가피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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