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윤지현 기자]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발발한 1597년 초, 충청·전라·경상도 3개 지역의 수군을 지휘하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투옥됐다. 그를 견제하려던 일본의 계책에 조선 조정이 말려든 결과였다.

이순신이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는 동안 삼도 수군을 책임진 이는 원균(元均)이었다. 원균은 그해 음력 7월 칠천량(漆川梁·경남 거제)해전에서 왜군에 크게 패해 전선(戰船)을 비롯한 전력을 대부분 잃고 자신도 전사했다.

선조는 당시 상황을 '수군 전군 대패'로 인식했을 만큼 큰 위기를 느꼈다. 그는 충청도와 전라도에 남은 배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를 끌어모아 전열을 다시 갖추라고 황급히 지시했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하면서 받은 임무였다.

그해 9월 이순신이 전선 13척으로 일본 수군 133척을 맞아 승리한 명량(鳴梁·전남 진도)해전의 배경이다. 칠천량 패전으로 전력 손실이 워낙 컸던 탓에 당시 조정의 관심사는 '각 도에 남은 배가 얼마나 수습되느냐'에 집중돼 있었다.

당시 군 지휘관 체찰부사(體察副使)였던 월탄(月灘) 한효순(韓孝純, 1543~1621)은 조정과 전장에 엄습한 위기감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해 여름 사이에 수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들이 궤멸했다. 주상께서 애통해하며 '한산도 수군의 일이 일시에 무너지고 전선이 1척도 없으니 경이 급히 30척을 만들어 수군을 도우라'고 하명하셨다. 명을 받은 이후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배를 만들어 변산 지역의 배 태반을 입수했다.'

한효순의 후손들이 1864년 펴낸 월탄연보(月灘年譜)에 수록된 글이다. 월탄연보는 한효순이 직접 쓴 글과 이후 다른 이들이 그의 입장을 옹호한 글을 모은 책이다. 임진왜란 때 지휘관으로 활약했고, 이순신을 돕던 인물이어서 당시 전장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글이 일부 포함돼 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월탄연보는 그간 존재 자체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순신 연구자인 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이 임진왜란 관련 기록을 모으던 중 월탄연보에 실린 임진왜란 관련 글을 발굴했다.

노 소장은 "한효순의 정유년 기록은 칠천량해전 패배 이후 선조를 비롯한 조정 전체가 상당한 위기감을 느껴 급히 전선 확보를 주문하고, 일선에서도 그만큼 막중하게 상황을 받아들인 당시 분위기를 전해 주는 글"이라고 말했다.

명량해전에 투입된 전선은 앞서 칠천량해전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이끌고 도망친 배들이었을 터이므로 한효순이 확보한 배가 명량해전에 바로 쓰이지는 않았을 듯하다. 그러나 한효순은 전부터 이미 전선 건조 업무를 맡고 있었다.

'정유년 봄 통제사 이순신과 전라좌수영에서 만나 수군의 일을 상의해 전선 23척을 여러 섬에서 별도로 만들기로 했다. 군관을 보내 기한을 정해 일을 감독한 지 몇 달 만에 마치고 연이어 한산도에 전선을 보냈다.'(월탄연보 중 정유년 기록)

수군을 잘 알았던 한효순은 한산도 수군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관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병신(丙申)년(1596년) 월탄연보의 기록이다.

'내가 한산도를 왕래한 뜻은 오로지 수군의 일에 있었으니, 격군과 병졸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식량 공급보다 중요한 일이 없으며 무기보다 긴요한 것이 없습니다. 한산도에 있을 때 통제사(이순신)와 이미 상의하며 다스려 온 부분입니다.'

노 소장은 월탄연보에 실린 한효순의 정유년 기록을 최근 출간한 '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여해)에도 부록으로 소개했다.

'증보 교감완역 난중일기'는 노 소장이 2010년 펴낸 난중일기 교감완역본에 북한 국어학자 홍기문(1903~1992)의 최초 한글 번역본 난중일기를 반영하는 등 내용을 보완하고 다시 번역해 내놓은 최종 완역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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