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작은 행사를 막론하고 뜻이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면 애국가를 제창(齊唱)한 다음 다른 순서를 진행하는 것이 정칙이다. 요즘 정부에서 주최하는 공식적인 행사장이라면 당연히 국민의례에 애국가제창이 들어간다. 4절까지 힘차게 불러 보기에 좋다.

그러나 소규모 행사에서는 1절만 부르고 나머지는 생략되는 수가 많다. 그것도 황감(惶感)하다. 상당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애국가제창을 생략하거나 국민의례 자체를 빼버리는 경우도 흔하기 때문이다. 일부 좌파세력들은 민중의례라는 이름으로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내걸거나, 애국가 말고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대체하는 수도 있다.

선진국 국민들은 길거리를 걷다가도 국가(國歌)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면 가던 길을 멈추고 따라 부른다. 그렇게는 못할망정 무슨 행사가 그렇게 바쁘다고 많아봐야 5분이면 끝날 일을 생략한단 말인가. 일제의 억압을 받던 시절 우리 동포들은 3.1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6.10만세운동 등 청사에 빛날 독립운동을 통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며 목 놓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만주벌판의 독립군, 감옥에 갇힌 애국투사들, 모두 간절히 부르던 애국가였다.

애국가는 안익태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작사자는 아직까지 불명(不明)이다. 윤치호설과 안창호설로 대립되어 있다. 윤치호는 구한말 독립협회를 주관했으며 일제 강점 후에는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총독부 하수인이 되어 광복될 때까지 철저히 친일파로 부귀영화를 누렸으며 일본 귀족원의원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광복 후 친일파 행적을 부끄러워한 나머지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애국가를 작사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애국가 가사지(歌詞紙)를 남겼기 때문이다. 가사지가 그의 작사를 확인시켜주는 증거물은 아니겠지만 어느 누구도 작사자로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유력한 보완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이 가사지가 사료적 가치가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윤치호를 애국가 작사자로 인정해달라는 딸 윤문희의 청원은 거부되었다. 딸은 가사지를 아버지의 모교인 미국 에머리대학에 기증하여  미국의 힘을 차용하는 듯한 묘한 입장을 보였다. 이것이 효험을 발휘한 것인지 국내에서 혜문스님과 안민석의원이 이미 알려진 가사지의 존재가 새삼 발견된 역사유물인 양 떠벌리며 미국에 직접 찾아가는 해프닝을 벌렸다.

혜문, 안민석 그리고 한신대 김준혁교수 등이 동행했으나 일부에서 위작(僞作)의견까지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애국가처럼 전 국민이 관심을 갖고 역사적으로 확실하지 않은 문제라면 결론을 유보하는 것이 학계의 정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SBS방송에서는 인기프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지상파 방송이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결정이 변경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일방적인 아마추어 방식으로 접근한 것은 자칫 역사를 오도할 수 있는 망발이었다. SBS는 윤치호 작사설을 부인하고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하고 있는 흥사단의 견해를 듣기 위하여 안용환, 오동춘박사를 1시간 넘게 인터뷰했다.

안창호에 의해서 창립된 흥사단은 100년이 넘는 애국단체다. 안용환박사는 수많은 증거자료를 제시하며 조목조목 안창호설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안용환의 성심과 소신에 찬 견해는 단 1초도 방영되지 않았으며, 함께 인터뷰에 응했던 오동춘을 강당 아닌 다른 곳에서 따로 인터뷰한 것을 양념으로 잠시 내보냈을 뿐이다. 방송의 공정성을 일탈한 것이 아닐까.

안창호는 미국과 상해임시정부 등 독립운동가들의 핵심역할을 하면서 윤봉길 의거이후 중국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일제경찰의 모진 고문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 사실상 옥사한 애국열사다. 친일분자였던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주장은 아무도 납득시킬 수 없지만 안창호 작사라면 능히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할만한 객관적 증거가 된다.

문제의 전말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안민석의원은 지난 8월12일 애국가 작사자규명 간담회를 개최했다. 윤치호측 김영갑, 흥사단 오동춘, 박화만, 임채승, 국사편찬위원회 등 7,8명의 사적 모임이었지만 내용은 그게 아니었다. 안민석은 2015년 광복 70주년이 되도록 애국가 작사자를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전제하면서 내년 광복절 행사 전에 반드시 작사자를 밝힐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석자 여러분의 연구와 협조가 꼭 필요하다고 하면서 특히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 관심을 갖고 동참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와 별도로 혜문은 에머리대 소장 가사지 환수절차를 밟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고 정부가 이를 거부하면 국민적 여론조성을 하겠다고 밝혀 마치 광우병 때나 세월호법처럼 역사를 여론에 의존하려는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보인다.

애국가 작사자 연구가인 노동은 교수는 아리랑 등 민요처럼 ‘민족공동체의 작사’로 결론을 맺자는 제안을 하기도 한다. 애국가 작사자는 반드시 규명되어야 하겠지만 정치적 힘으로 부실한 증거를 억지로 꿰어 맞추는 견강부회는 금물이다. 자칫하면 역사 앞에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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