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봄 4.19혁명이 성공한지 꼭 50년이 흘렀다. 4.19혁명 50주년 기념행사가 많고 컸다. 매스컴에서도 당시의 현장을 재연해가며 그 높은 뜻을 기렸다. 한 나라의 정권을 뒤엎을 만큼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켰던 4.19혁명의 원인을 파헤치고 경과를 되돌아보는 것은 미래에 대한 깊은 경계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광복 이후 미군정 3년을 거쳐 정부를 수립한 대한민국은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다.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내각책임제를 제시했으나 이승만의 지시로 대통령중심제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장 신익희, 대법원장 김병로로 세 사람 모두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했다. 초대 국무총리는 청산리 대첩의 사실상 주인공인 이범석이 국방부장관을 겸하여 임명되었다. 거의 반세기에 걸친 일제강점기를 끝내고 당당한 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임금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세습하던 봉건왕조에서 이제는 국민의 손으로 집권자를 선출하는 주권재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뿌리 깊은 신분제도도 폐지되어 평등한 사회를 이룩했다. 일본 총독부는 이 신분제도를 통치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통령 이승만은 구 왕조의 혈족인 전주이씨다. 이미 70세를 넘긴 그는 완고한 노인의 전형적인 독선의 면모를 보였다. 임시정부 대통령을 맡았을 때도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고 수많은 분파작용을 일으킨 바 있다. 개혁을 부르짖으며 왕조에 저항하다가 오랜 감옥살이를 했던 명성과는 영 딴판인 모습이었다. 이것은 정부수립 후에 더욱 극렬하게 재현되었다. 이제는 누가 뭐라고 하던 한 나라의 대통령이다. 아직 경제적으로 빈곤하고 국제적 기반이 약하긴 했지만 세계열강이 승인한 나라다.

내각책임제를 마다하고 대통령중심제를 택한 그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권위와 명성이 옛날 임금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고 믿을 수 있다. 그래서 국부(國父)로 떠받들어지는 것을 가장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권력의 주변에는 언제나 아첨꾼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왕 이상으로 그는 떠받들어졌고 무소불위의 권력은 왕을 능가했다. 구중궁궐 같은 경무대 깊숙이 들어박힌 노완(老頑)은 민심의 흐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독재의 권력을 휘둘러댔다. 제헌국회에서는 간접선거가 유리했다.

그러나 이제는 야당의 목소리가 커졌다. 국회가 불리해지자 이번에는 직접선거로 헌법을 고쳤다. 부결된 것을 사사오입으로 통과시키기도 하고 6.25동란의 와중에는 헌병으로 하여금 야당의원들을 버스에 태워 납치하는 정치파동을 일으킨다. 연속적인 독재 권력의 남용은 민심을 유리(遊離)하게 만든다.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는 오랜 정치통설 그대로 이승만 정권은 썩은 냄새로 뒤덮였다.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원조는 모조리 자유당정권의 정치자금으로 빠져나가 몇몇의 배만 불렸다.

게다가 12년을 집권하여 80세를 넘긴 이승만의 후계자를 자처한 국회의장 이기붕 일파는 천추에 더러운 이름을 남긴 3.15부정선거를 획책한다. 이미 국민과 동떨어진 이승만정권의 단말마적인 부정선거 행각은 국민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4.19혁명이다. 그 대강의 흐름은 2.28 대구 고등학생 궐기, 3.15마산시민 궐기와 김주열의 죽음, 대학생데모의 효시인 전북대 4.4시위 그리고 4.18고려대 데모로 이어진다. 특히 4.18고대데모는 광화문까지 진출했던 시위대가 귀교도중 권력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의 습격을 받고 1백여 명이 피투성이가 되는 참사로 변해버렸다.

권력이 폭력배와 손을 잡은 가장 저열하고 비겁한 현장을 목격한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4.18데모는 고대 학생회장단의 치밀한 계획 하에 이뤄졌다. 그 중심에 이기택이 섰다. 그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2천여 학생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4.18선언문을 낭독했다. 고대 정외과 2학년이었던 조인영 강원대 명예교수는 “이기택선배가 선언문 낭독을 끝내자 우레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당시 총장이었던 유진오는 후일 신민당의 삼고초려를 받고 총재 겸 대통령후보로 정계에 나선다.

그는 국회에 4.19세대가 없음을 개탄하며 이기택을 전국구후보로 추천하여 29세의 패기에 넘친 젊은 국회의원이 탄생한다. 이기택은 4.19혁명세대로서 각광을 받으며 국민의 여망에 어긋나지 않는 정치활동으로 7선의 고지에 오른다. 정치적인 고비가 있을 때마다 그의 역할은 더욱 빛을 발휘한다. 유리한 쪽보다 불리한 쪽에 서서 사태를 반전시켰고 평생 야당만을 해오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가 5월27일 4.19혁명 공로자회 회장으로 선출된 것은 의거로 왜곡되었던 4.19혁명을 진정한 혁명으로 부각하는데 큰 역할이 될 것이다.

그는 수락연설을 통하여 4.19회관 건립, 4.19혁명 3단체 통합, 유공자 연금을 포함한 포상문제 등 산적한 난제를 해결하는데 여생을 바쳐 봉사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중에서도 3단체 통합은 가장 시급한 현안이다. 이기택의 4.19혁명 공로자회 회장 취임을 계기로 4.19혁명정신이 더욱 크게 발양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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