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보다 중요한 ‘대응 메뉴얼’ ·· 남고생을 위한 ‘각서’

여성혐오적 욕설, 페미니즘에 적개심이 많은 남고생, 작가가 나설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여권 정치인들을 폭로한 미투 운동과 여성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에 대응 매뉴얼 제공

2018-03-12     박효영 기자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고등학생 아들을 둔 어머니 A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들 B군은 창백한 얼굴로 사과했다. 역사 에세이를 쓰는 박신영 작가는 A씨와 B군 그리고 C씨(B군의 이모)를 만났다. 

박 작가는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B군으로부터 수 차례 악성 댓글 피해를 받았다. 박 작가는 B군과 아무 연결고리가 없었고 넷상에서 토론으로 마찰을 빚은 적도 없는데, B군은 무턱대고 욕설을 남겼다. B군은 페미니즘적 관점으로 글을 쓰는 페북 계정을 찾아다니면서 상습적으로 욕설 댓글을 달았고 박 작가는 이런 점을 알고 그냥 넘어가지 않기로 맘을 먹고 대응에 나섰다. 

B군의 페북 계정에는 “페미 다 죽여버리고 싶다”라는 대문글이 적혀 있었다. B군은 페미니즘에 대한 적개심으로 테러를 가하고 있던 것이다. 

B군은 페이스북 계정에 페미니스트에 대한 적개심을 대놓고 드러냈다. (캡처사진 제공=박신영 작가)
박 작가는 B군이 남긴 악플을 그대로 캡처해서 보관해뒀다. (캡처사진 제공=박신영 작가)
박 작가는 이보다 더 많은 악플 내용이 있었지만 B군이 다 지워버려서 전부 확보하지 못 했다고 밝혔다. (캡처사진 제공=박신영 작가)

박 작가는 11일 12시 서울 모처의 카페에서 B군을 만나 정식 사과와 각서를 받았다. B군은 어머니 A씨가 보는 앞에서 본인이 작성한 악플을 낭독했고 자필 사과문과 재발방지 각서를 작성해 박 작가에게 제출했다. 박 작가는 B군이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법적 보호책임이 있는 A씨에 대해서도 사과문과 각서를 받았다.  

박 작가가 A씨, B군, C씨에 이날 진행될 사과문과 각서 작성 등의 순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박 작가는 “B군과 같이 요즘 남성 청소년이 여성 청소년에게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종의 놀이가 됐고 이 친구가 나중에 성장해서 여성혐오적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며 “그게 개인적인 피해를 당한 것을 뛰어넘어 꼭 사과를 받아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라고 밝혔다. 

A씨와 C씨는 보통의 학부모가 그렇듯이 “우리 B군은 평소에 말수도 적고 조용한 편이에요.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성격이 차분하고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는 아이입니다”라고 말했다.  

B군은 박 작가에게 사전에 보낸 반성문 초고를 통해 “초등학생일 때 알게 된 여성 친구가 페미니즘적으로 남녀를 편가르기 하는 것을 보고 분노한 적이 있다”면서 페미니즘에 적개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사실 2016년 5월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 이전에는 한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논의된 적이 없었다. B군이 초등학생이던 시절이라면 적어도 4년 전인데 그 당시 같은 초등학생 이성 친구가 그런 의식으로 언행했다는 진술에 대해서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 

A씨와 B군은 박 작가가 보는 앞에서 직접 사과문과 재발방지 각서를 작성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B군은 당황했을 것이다. 많이 난처했을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욕을 하고 강하게 나오면 여성들이 위축돼서 그저 페미니즘적 발언을 하지 못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렇게 반격할 수 있다고 전혀 예측하지 못 했던 것이다. 

이날 카페에는 박 작가가 사전에 동석을 요청한 페북 친구들이 10여명 가까이 모였다. B군의 욕설을 접한 여성들도 엄연히 인격체로서 항의할 수 있다는 좋은 사례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서 참석자들이 공감했다. 참석자들은 하나같이 “성희롱이나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을텐데 이렇게 좋은 매뉴얼을 만들어줘서 박 작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박 작가의 페이스북 친구들이 요즘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 등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현재 안희정 전 충남지사·정봉주 전 의원·민병두 전 의원 등 여권 정치인들에 대한 성범죄 고발 미투 운동이 이어지고 있는데, 여권을 지지하는 일부 시민들이 정치적 진영논리에 따라 피해 고발을 한 여성들에게 2차 가해를 일삼고 있다.

아무 근거없이 피해자에 대한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모욕하는 등 2차 가해를 일삼는 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다. 박 작가가 보여준 대응 매뉴얼은 이런 일들에 대해 제대로 대처할 수 있는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  

박 작가는 “B군이 욕설을 반복한 것과 그 내용을 봤을 때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생각을 가질 거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본인의 잘못으로 부모가 이렇게 가슴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교육적 효과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이후에도 B군이 다른 여성들에게 그런 짓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이날의 사례가 좋은 매뉴얼이 될 것이라며 공감대를 형성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남성 참석자인 D씨는 “요새 유명인들이 미투 운동을 통해 걸리고 있지만 사실 가해자가 일반인일 경우에는 해시태그(단어 앞에 # 기호를 붙여 그 단어에 대한 글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기능)가 잘 되지 않고 있다”며 “이게 피해 여성에게는 생존이 걸렸고 싸워야 할 문제다. 이렇게 미투 운동의 효과가 미치지 않는 일반 피해 여성들에게 오늘의 이 자리가 유명인에 대한 미투 고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자리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이어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많지는 않을지 몰라도 남성들도 분명 작가님의 용기있는 행동에 응원을 보내고 있고 미투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달라”고 밝혔다.

물론 박 작가의 방식으로 일일이 모든 언어적 가해자에 대해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성가족부·더불어민주당·바른미래당 등 미투 운동 이후 성범죄 관련 대책을 쏟아내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참고 사례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