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주차 선 하나, 지역경제 살린다

2025-05-08     박주환 기자

[중앙뉴스= 박주환 기자] 황금연휴 첫날, '아이들 웃는 얼굴을 보자'는 마음으로 가족을 태우고 고속도로로 나섰다. 가다 서다를 반복한 지 몇 시간만에 바다에 도착해 겨우 한숨 돌렸지만, 휴가지 입구마다 붙은 표지판이 다시 숨통을 조였다.

'주차 만차'. 안내요원을 따라 차를 돌리기를 세 번,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과자를 다 먹었고, 아내는 "차라리 집 근처 공원에 갈 걸"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결국 해변에서 2 킬로미터 떨어진 도로변에 1만 원짜리 '비공식' 주차를 하고 뙤약볕 아래를 걸었다. 피곤과 짜증이 휴가보다 먼저 몸에 들어왔다.

뉴스에서 들었던 먹을거리도, 볼거리도 그 순간엔 모두 무용지물이다. 차량이 도로를 따라 흐르는 경제 주체라면, 주차장은 그 흐름을 담아낼 그릇이다. 그릇이 없으면 물이 밖으로 흘러버리듯, 사람과 돈도 지역 밖으로 빠져나간다.

▲ 선 하나가 여는 경제의 톱니바퀴
주차장은 허허벌판에 선만 긋는 일처럼 보이지만, 그 선 하나가 '사람 → 소비 → 상권 → 추가 인프라 → 재방문'이라는 다섯 개 톱니를 맞물리게 한다. 차를 대면 사람들은 화장실과 벤치를 찾는다. 목을 축이면 배가 고프고, 배를 채우면 놀이동산이나, 기념품이 눈에 들어온다. 이  작은 소비는 상인들 눈에 '될 만한 장사'로 비치고, 점포가 늘면 숙박·문화시설 같은 2차 인프라가 따라붙는다. 선순환의 첫 고리는 결국 넉넉한 주차면수다.

▲ "자리가 있으면 온다"를 증명한 현장들
충남 예산시장
전통시장과 맞닿은 땅에 공영주차장과 광장을 조성한 뒤 1년 만에 방문객 300만 명. 3년 사이 1,700억 원이 시장 안을 돌았다. 발길은 시장을 넘어 예당호 출렁다리와 수덕사까지 퍼졌다.

포항 청하공진시장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 촬영지라는 콘텐츠에 195면 주차장 하나를 더했더니, 매달 관광버스 30대 이상이 몰렸다. 어촌 골목엔 카페·기념품점·포토존이 빠르게 생겨났다.

강원 원주 구도심
600면 규모 공영주차장을 깔자, 낡은 골목길에 외지 승용차 행렬이 들어찼다. 빈 점포가 눈에 띄게 채워지고 있다.

세 곳의 공통점은 간단하다. 차가 먼저 들어왔고, 주차 공간이 준비돼 있었다는 점이다.

▲ 이벤트는 반짝, 인프라는 연속적
여행 쿠폰과 축제 홍보 예산은 행사가 끝나면 효과도 사라진다. 광주 충장로 상인들이 "거리 축제보다 저렴한 공영주차장이 먼저"라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주차장은 한 번 깔면 유지비는 적게 들고, 손님 유치는 '24시간 영업'이다.

반대로, 지난 부산 세계라면축제처럼 미포장 주차장과 엉킨 동선은 "먼지 라면"이라는 불명예를 남겼다. 콘텐츠에 아무리 공을 들여도 공간 인프라가 준비되지 않으면 행사는 결국 자기 발목을 잡는다.

▲ 공간이 창출하는 새로운 산업 생태계
주차장은 단순한 '차 보관소'가 아니다. 센서가 달린 구획 하나하나가 데이터 광산이자, 모빌리티 허브가 된다. 차량 입‧출차 시각, 점유 시간, 회전율, EV 충전 기록까지 수집하면 그 자체가 AI 학습용 원석이다. 정부가 이 데이터를 표준화해 개방하면, 스타트업부터 대기업까지 다양한 플레이어가 뛰어드는 기회를 만들게 된다.

휴가지에 아무데나 내려서 버튼 하나 눌러서 자율주차가 되는 세상. 자율주행은 아직 어렵다. 하지만 자율 주차라면? 규격화·정형화된 공간이라면, 한번 해볼만하지 않을까.

스마트폰 앱 하나로 주차공간 탐색‧예약‧결제‧출차까지 끝낼 수 있다면, 주차장이  ‘디지털 터미널’이 된다. 앱 하나로 광고·보험·플릿 관리, 체류 시간·이동 패턴을 분석해, 맞춤형 광고를 송출하거나, 보험사가 데이터를 활용해 휴가철 단기 맞춤형 보험의 요율을 산정한다면 새로운 맞춤형 솔루션이 될 것이다.

주차장 인근에 놀이동산이나, 쇼핑몰까지의 셔틀을 운행한다면, 새로운 일자리 창출이 될 수도 있다. 애들은 놀이동산으로, 어른들은 쇼핑몰로 갔다가, 셔틀을 타고 푸드코트에서 다시 만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셔틀이 정해진 노선을 운행하는 자율주행 셔틀버스나, 자율주행 트램이라면, 연료나 엔진오일같은 유지관리비용이 훨씬 적게 든다.

센서 제조 → 통신 모듈 → 클라우드 처리 → AI 분석 → 앱 서비스까지 밸류체인 전반에서 새 일자리와 투자가 솟는다. 테슬라를 단숨에 따라잡기는 어려워도, '자동 주차'라는 한 분야만큼은 우리가 글로벌 톱을 노려볼 수 있는 틈새다.

규격화·정형화된 데이터 덕분에 에너지·물류 혁신도 엮인다. 주차장을 EV 급속 충전 허브로 바꾸면 한 곳에서 충전·간단정비·자동세차까지 원스톱으로 끝난다. 전력 수요를 분산 제어하는 V2G(Vehicle‑to‑Grid) 서비스가 자리 잡고, 여기에 간이지붕을 씌우고 태양광 패널을 설치한다면 주차장은 전력 시장에 참여하는 '작은 발전소'까지 된다. 

휴가지 쇼핑도 달라진다. 여행자 이동 경로 속에 스마트 픽업 락커가 있다면 '짐 걱정'은 사라진다. 서울에서 주문한 수영복을 강릉 해변 주차장 락커에서 바로 찾고, 집으로 보낼 특산품은 같은 락커에 맡긴다. 

사람의 동선이 곧 경제가 된다. 주차면 하나가 도시와 지방에 교통·에너지·물류·관광 데이터를 창출하며 새로운 경제동력을 탄생시킨다. 공간이 그대로 산업 생태계로 변신하는, 'K‑주차장'의 다음 스텝이다.

이번 연휴에도 약 300만명이 해외로 빠져나갔다. 해외결제액만 수천억원에 달한다. 사람들은 돈을 쓸 땐 쓴다. 국내에서 돈을 쓰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돈씨'란 말이 있다. 그 돈이 국내에서 돌고 돌며 새로운 경제 사이클이 될 수도 있는 여지가 있다.

트럼프의 관세폭풍으로 국외 여건이 안 좋을 때에도, 국내에서 활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 중앙은 인프라, 지방은 콘텐츠
이제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중앙정부는 전국에 통일된 ‘K‑주차장’ 표준을 마련하고 안전 규격·데이터 체계를 잡는 인프라 담당을 맡는다. 지방정부는 그 틀 위에 지역 특색과 이야기를 얹는 콘텐츠 담당에 집중한다. 각자 잘하는 일에 몰두하기만 해도 주차장은 시멘트 바닥을 넘어 지역경제의 결절점이 된다.

만약 지방에 정말로 관광콘텐츠가 없다면, 주차공간과 전기차 충전을 메인 콘텐츠로 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주차장은 평평하고 도로와 바로 붙어 있어 화물차가 드나들기 쉬워, 비 휴가철엔 마이크로 물류센터가 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런 '도로에 접한 평지'는 향후 공공창고, 전기차 충전 허브, 지역 축제장 같은 새로운 개발 수요를 끌어들이는 땅이 된다. 

또한 주차면이 그대로 예상 관광수요가 되기 때문에, 예측이 가능해지고, 관리가 용이해진다. 관광객 수에 비해 화장실이 모자란 경우를 우리는 많이 겪어보았다.

중앙 정부로서도, 지방 정부로서도 주차장 투자는 단순 주차 공간을 넘어 물류·재난·상업 기능을 동시에 품은 다목적 부동산 개발로 이어질 여지가 크다.

또한 재해가 나면 사람은 안전한 건물 안으로 피신하고, 주차장은 구호물자를 실어 나르고 모아 두는 임시 거점으로 바꿀 수 있다. 포장만 잘 돼 있으면 컨테이너나 텐트를 바로 내려 설치하면 된다.

잘만 된다면, 새마을운동처럼 'K-관광 플랫폼'으로도 수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명분은 차고 넘친다는 거다.

▲ 공간이 경제가 되는 마법
차량은 흐르는 경제 주체, 주차장은 그 흐름을 받아내는 그릇이다. 중앙은 인프라, 지방은 콘텐츠. 각자의 역할에 집중할 때 K‑주차장을 기반으로 한 지역경제 활성화는 현실이 된다. 그 공간에서 모이는 데이터는 기술 혁신과 새로운 경제 동맥이 될 것이다. 선 하나를 긋는 순간, 지역은 움직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