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어쩔 수가 없다’는 패배주의다

2025-09-08     전대열 대기자
전대열 대기자. 전북대 초빙교수

[중앙뉴스 칼럼= 전대열 대기자]몇 년 전 제주도 서귀포에서 추사관을 찾았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는 조선 후기의 학자로 제주도에 9년간 유배되었다.

그는 희망 없는 귀양살이에서도 학문과 예술을 가까이하며 세한도를 남겨 현재 국보 180호로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歲寒圖는 앙상한 소나무와 잣나무 한그루씩이 그려져 있고 초라한 집 한 채가 서 있으며 나머지는 여백으로 화려한 산수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역경 속에서도 꼿꼿한 선비의 지조를 지키는 정신적 울림이 있다.

추사관은 제주를 찾는 이들의 관광 명소다. 2층에서는 ‘반석’선생이 자리 잡고 방문객들에게 글씨 한 폭씩을 기증한다. 즉석에서 써 주지만 의미 있는 글귀 100개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한다. 나도 줄을 서 기다리다가 “그 어쩔 수 없음조차 나는 사랑했다”를 받았다. 사무실 벽에 붙여 놨더니 오는 사람마다 읽는다. 내 맘대로 할 수 없을지라도 그걸 즐기고 사랑하면 된다는 희망이 깃들었다고 생각하면 되겠다는 뜻에서다.

그런데 요즘 ‘어쩔 수가 없다.’가 유행어처럼 번지며 화제를 불러 일으킨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제목이다. 끄트머리에 사랑했다는 말은 빠졌지만 나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의 원작은 1997년에 웨스트레이크가 쓴 The Axe다. 원작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까지 영화화된 일은 없다.

이 작품을 박찬욱이 한국과 빗대어 영화로 만들었지만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하기까지 알려진 바는 없었다. 13년 만에 초청받은 영화였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공전절후의 인기다. 이미 200여개 국과 계약을 맺고 영화 제작비의 손익 분계선을 뛰어넘었다고 발표되었다. 국내에서는 오는 9월24일 개봉하기로 했는데 천만 관객을 목표로 하지 않을까. 한국의 영화는 그동안 일취월장 국내외를 누볐다. 국내 배우들이 세계 무대를 휘저으며 유명 국제영화제에서 주연 배우상을 수상하는 것도 이제는 큰 뉴스가 아니다.

이에 힘 입어 K-팝은 훨훨 날아 오른다. K가 붙은 모든 부문에서 한국은 위세 등등하다. 마스가로 통하는 K조선(造船)은 미국의 트럼프조차 녹였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경쟁 부문 수상을 목표로 했으나 여기서 탈락했다는 뉴스를 접했지만 박찬욱의 영화가 인기몰이를 하는데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는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이병헌과 손예진이 주연으로 등장했다. 원작의 줄거리를 대부분 인용하면서 이를 한국적 현실과 맞췄다.

주인공은 대기업에 근무하는 중산층 가정을 꾸렸으나 구조조정의 여파로 해고의 쓰라림을 겪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2년 동안 온갖 노력을 한다. 실직의 고통 속에서 그는 점차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 자신과 경쟁 관계가 될성부른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하고 사고사로 위장하여 한 명씩 살해한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현실화시키는 범죄 영화다.

그는 가족을 위한 일이라고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폭력을 만성화하고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는 심리극적 색채를 강화한다.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항상 볼 수 있는 구조적 모순에 대한 반발을 인간의 미친 기운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등장하는 게 아파트와 회식문화 그리고 취업전쟁이다. 폭등한 아파트는 같은 지역에서도 갈등의 요인이 되며 상하 동료 간의 회식문화는 화합이 아니라 갈등으로 치닫는다.

취업을 둘러싼 전쟁은 친구 사이도 멀게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온갖 범죄 끝에 취업에 성공하지만 그는 이미 인간성을 상실한 동물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잔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주인공이 범죄를 통하여 획득한 것은 안정과 화합이 아니라 더 큰 공허와 불안 그리고 광기(狂氣)만 남았다.

BBC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 보편적인 비극적 블랙코미디의 귀결”이라고 평했다. 여기서 필자는 어쩔 수가 없다는 제목은 패배주의를 지지하는 말이어서 고통과 불행을 이겨내고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어낸 인내, 희망과 배치되는 뜻으로 해석하고자 함을 덧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