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한나 기자

 

소리에 대한 기억

이규배

 

  늦은 저녁 플라스틱 차양을 투닥이는 굵은 빗방울 소리,

  쌀뒤주 바닥을 닥닥 긁다가 무릎을 끌어안고 오래 울고 있는 어린 누이의 흐느끼는 소리, 붉게 달아오른 연탄, 양은솥에 맹물 끓는 소리,

  늦은 밤 대문이 열리고 짐자전거에 팔리지 않은 배추를 싣고 돌아오는 아버지의 늙은 자전거바퀴 소리,

  영어책을소리높여읽어대는 서툰발음소리, 빗소리큰소리,

  금이 간 날개가 돌아가는 힘겨운 선풍기 소리, 젖은 교복을 다리는 소리,

  밤새 울부짖다 잦아드는 이웃집 소리,

  아침 참새의 소리, 국숫물이 끓는 소리,

  겨드랑이 털이 올라오는 소리,

  멀리서 굴러오는 아버지 짐자전거 바퀴 소리는

  찌릉찌릉 종을 울리며 여름햇살을 묶어 싣고 온다.

 

 

                                                        - 이규배 시집 『사랑, 그 뒤에』에서

-----------------------

  그런 시절이 있었다. 대다수의 국민이 가난했던 그런 시절이... 요즘 젊은이들은 잘 모를 그렇게 가난하고 어여뻤던 소리들의 시절 말이다.

  인간이 기억을 저장고에 저장하는 방식에는 숫자나 공간, 혹은 어떤 향기나 모양, 색깔 소리 등이 있다. 화자가 나열하듯 진술해 놓은 소리의 싯귀절 마다 뼈가 시리도록 배고픈 그리움의 소리들이 아련히 들려온다. 가난이 그리움의 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 시절의 정서가 그토록 따스했으며 애틋한 사랑과 눈물과 꿈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린 누이가 바닥난 쌀뒤주 닥닥 긁다가 울던 소리, 제비새끼 같은 자식들의 입에 밥 한술이라도 넣어주려는 아버지의 짐자전거 소리 등은 화자를 성숙시킨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성장기의 소리들을 회상하며 시로 승화시켜낸 순간 시인의 가슴에서 울고 있던 소년은 비로서 눈물을 닦아내고 환하게 웃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성숙하게 하고 정서의 샘이 흐를 수 있게 하는 추억의 소리들을 모처럼 눈시울 적시며 음미해 보았다. 요즘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소리 소리들이 광장에 들끓고 있어 답답하고 안타깝다. 아련한 기억의 저편에 숨어 숨 쉬고 있는 당신의 소리들은 무엇인가? 기억의 달팽이관 속으로 들어가 그 소리들을 소환해 본다.

[최한나]

---------------------

이규배 시인/

1964년 전북 여산 출생.

『80년대』 2집으로 등단.

시집 / 『투명한 슬픔』 『비가를 위하여』 『아픈 곳마다 꽃이 피고』 『사랑, 그 뒤에』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