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종민 시인 / 수필가     ©중앙뉴스

[중앙뉴스=박종민] 수저라고 한다면 숟가락과 젓가락을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숟가락 젓가락이 흙으로 만들고 금으로 만들어 졌다? 어디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도대체 말이 안 되지요. 이런 엉터리 조합이 어디 있습니까? 흙 수저 금 수저는 그간 논의된바 없었던 말입니다.

대한민국건국이래 근래에 이르기까지 단 한 차례도 논해온 일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흙으로 수저를 만들겠습니까? 혹시 금 수저는 몰라도. 하지만 금 수저도 금으로 도금은 해서 쓸 수는 있어도 순금으로 수저를 만든다면 그 금 수저는 사용은 불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디 금고 속에 감춰두는 금괴처럼 재물관리차원으로 보관 하려는 의미의 금 수저는 가능하겠지요. 흙으로 만들어 낼 수도 없는 흙 수저와 사용이 불가한 금 수저를 요즘은 퍽도 많이들 쓰고 있습니다. 말로 쓰고 사용하며, 말로 시작해서 말로 끝나는, 말썽이 많은 흙 수저와 금 수저입니다. 

 

이 쓰지도 못하는 수저들이 세간에 말길에 왜 올랐을까요? 아마도 그 누가 그냥 신조어로 만들어 낸 말인 듯싶은데, 그 반향(反響)이나 파장(波長)이 만만치 않습니다. 부잣집 태생은 금 수저요, 가난한 집 태생은 흙 수저라고들 말합니다.

말 자체가 성립이 될 수가 없는 건데 그렇게들 말하며 마구 써대고 있습니다. 억지로 만들어 낸 말임이 틀림없건만 그 누구 하나 여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이런 억지의 말을 그만 사용하고 폐기하자 나서는 자 없습니다. 흙 수저와 금 수저를 내세워 이 시대의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간의 울타리를 치고 있습니다.

편 가르기를 하고 있습니다. 계층 간 세대 간의 간극(間隙)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 놨을까요? 힘겨운 삶의 마당일 것입니다. 경제적 어려움에 가중되고 있는 취업난과 벌어지기만 하는 계층 간 소득 격차가 주요 원인 이리 싶습니다.           

 

사람의 타고난 생태환경(生態環境)이나 태어난 팔자(八字)를 가지고 어떤 굴레를 씌워 도매금으로 매도(賣渡)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 자체를 가지고 흙과 금으로 나눠 너는 되고 너는 되질 않는 사람이라고 규정지어 버리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좀 더 잘 살아 보겠다고 부지런히 일하고 성실하게 뛰는 사람들에게서 용기를 빼앗아갑니다.

열심히 살아가면서 노력을 다해 매진(邁進)하는 사람들에게 의욕을 꺾고 힘을 빼고 있습니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알몸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모의 가진 것과 못 가진 것의 차이는 있을망정 태어난 생태는 똑 같은 빈 몸, 알몸입니다.

세기(世紀)의 부호(富豪) 재벌(財閥)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국내의 굴지기업, 재벌가들 역시 시작 할 당시엔 모두 다 빈손이었고 빈 몸이었습니다. 사막의 모래바닥에서 뭔가를 찾아 일궈내는 노력과 열정으로 오늘의 부와 명예를 거둬냈습니다.

 

흙 수저와 금 수저를 말하는 건 잘 사는 사람에 대한 시샘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입니다. 자기 성찰의 미흡과 냉소적인 열등감에서 빚어진 사회관 인간관이라 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각자 주어진 평등한 인권과 대등한 자유를 가지며 누립니다.

내가 비록 경제적 사회적 약자라 하더라도 흙 수저라고 비하하거나 나약해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누리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며 삶의 평등한 마당입니다. 사람들마다 마땅히 여건이 다르고 환경이 다릅니다. 좀 잘 산다고 해서 금 수저라 붙이고 가난하고 못 산다고 해서 흙 수저라고 붙여댄다는 것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삶이 경제사회적여건에 따라 격차가 나고 계층 간에 오르내리는 사다리가 불균형이 돼 있더라도 자 포 자기는 자기비하의 말입니다. 이제 그만 멈춰야 합니다. 자학(自虐)에서 벗어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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