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정겸 교수     © 중앙뉴스

[중앙뉴스=김정겸] 요사이 필자는 말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고 있다. 《논어(論語)》의 〈학이(學而)〉와 〈양화(陽貨)〉에서 공자가 말하는 것으로 巧言令色鮮矣仁(교언영색 선의인)이라는 문구가 있다. 이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민 얼굴을 하는 사람치고 착한 사람이 드물다”는 뜻으로 말을 그럴듯하게 꾸며 비위를 잘 맞추거나, 웃으며 아첨하는 사람사람이 진실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사유를 통해 관념적 사유와 경험적 사유를 통한 말의 중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책상위의 사과는 빨갛다”라고 했을 때 이 명제는 경험적 진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저 사과가 오랜 시간이 흘러가면서 마르고 시들어 썩어 버리면 더 이상 ‘빨갛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적 진리는 믿을 수 없는 우연적 진리인 것이다.

 

플라톤(Platon)은 세상을 크게 두 개로 나누어 본 이원론자이다. 하나는 감각적이고 변화무상한 현실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첫 번째 그 현실의 세계 저 너머에 있는 이데아(Idea)세계이다. 이 이데아 세계는 현실의 감각적 세계처럼 변화하지 않는 참된 진리의 세계이다.

눈앞에 보이는 “책상위에 있는 빨간 사과”는 현실세계에 있는 사과로서 세월이 가면 썩어서 모습이나 맛이 바뀌게 되는 사과이다. 따라서 이는 참된 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경험적 진리라 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사과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사과는 머릿속(Idea)에 있다.

이데아(Idea)라는 단어는 영어 idea에서 온 것이다. 플라톤(Platon)의 영향을 받은 데카르트(Descartes)나 칸트(Kant)같은 사람을 관념론(Idea+l+ism)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념(觀念)이란 단어도 “생각(念)으로 본다(觀)”는 뜻으로 생각(idea)에서 온 것이다.

 

경험적 말은 진리일 수가 없다. 경험적 진리(말)와 구별해서 볼 수 있는 진리를 선험적(a priori) 진리(말)라고 한다. 선험(先驗)적이라는 단어는 경험(驗) 이전(先)이라는 것으로 경험적 진리와 구별될 수 있으며 선험적 진리는 우연적 진리와는 상반되기 때문에 필연적(必然) 진리가 된다.

 

선험적 진리는 '2+3=5'와 같은 수학적 진리이며 이 진리는 우연적일 수 없고 반드시 꼭(必) 그렇다(然)는 것이다. 선험적 진리는 공리를 의미한다. 공리[axiom, 公理]란 어떠한 증명도 할 필요 없이 항상 참으로 받아들이는 명제를 말 한다. 즉, 스스로 분명한 [자명(自明)] 진리이다.

 

우리 이성은 항상 자명하게 열려 있어야 한다.

칸트(Kant)는 실천원칙들(praktische Grundsätze)은 자기 나름의 많은 실천 규칙(praktische Regeln)들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이 실천원칙들은 주관적이 이며 이를 준칙(Maximen)이라 한다. 그러나 이 주관들이 이성 존재자들의 의지에 타당한 것이 되면, 즉 실천원칙들이 객관적이면 법칙(Gesetze)이 된다.

 

우리의 모든 이성적 존재자는 ‘법칙’적 이어야 한다. 정언 명법적이어야 인간을 목적 그 자체로 대하게 되고 삶이 윤택해 진다. 모든 말은 사유로부터 나오는 말이니 조심히 생각해서 발화해야 할 것이다.

 

이성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은 언제나 아름답다.

데카르트(Descartes)는 확실한 앎을 위해 모든 것을 의심해보는 방법적 회의를 한다. Descartes는 제일 먼저 의심해보는 것이 앞서 말한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것들 이다. 이 감각적이고 경험적인 것들은 우리를 속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고 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의심해 보는데 딱 한 가지는 절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모든 것을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의심의 여지없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ergo sum)라는 위대한 명제가 탄생한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과정에서도 ‘생각하고 있는 나’가 없다면 의심 그 자체도 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대인관계에 있어 수많은 말이 오고 가는 데 있어 좀 더 많이 생각하며 또한 감각적 경험도 온전히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본다. 감각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눈앞에서 나를 현혹하는 그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감각을 완전히 배제한다면 무 감각적인 사람이 되어 맛과 멋없는 사람이 될 것이다. 가슴을 울리게 하는 사고적 감각도 필요하겠다. 단, 우리가 주의할 점은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Kant)이라는 사실이다.

 

/김정겸/한국외국어 대학교 철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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