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건이 마련되어 성과가 보장되면 정상회담 가능, 미국의 호응 이끄는 것이 중요, 북한과의 조율 중요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모두의 예상대로 남북 정상회담 제안이 공식적으로 이뤄졌다. 김여정 제1부부장(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은 김정은 위원장(북한 노동당)의 특사로서 공식 친서를 문재인 대통령에 전달했다. 

청와대 접견실에 들어온 김 부부장은 검은색 007가방을 들고 있었다. 여기서 꺼낸 서류철에는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휘장과 함께 김 위원장의 공식 직함으로서 국무위원장이 표시 돼 있었다. 북한의 국가 원수가 문 대통령에 만나자고 공식적으로 제안한 것이다.  

북한 고위급 대표단(김여정 제1부부장·김영남 노동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최휘 국가체육지도위원장·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이 10일 오전 청와대를 찾아 문 대통령과 오찬을 가졌다. 

김 부부장이 문 대통령에 친서를 전달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김 부부장이 문 대통령에 친서를 전달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김 부부장은 “빠른 시일 내에 평양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며 “문 대통령께서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서 많은 문제에 대해 의사를 교환하면 어제가 옛날인 것처럼 빠르게 북남관계가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통령께서 통일의 새장을 여는 주역이 돼서 후세에 길이 남을 자취를 세우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 부부장은 친서를 전달하며 문 대통령의 조속한 평양 방문을 요청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 부부장은 친서를 전달하며 문 대통령의 조속한 평양 방문을 요청했다. (사진=청와대 제공)

문 대통령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바로 수락하지는 않았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대신 전해준 문 대통령의 정확한 답변은 “여건을 만들어서 성사시키자”였다.

그 여건이라는 것은 결국 북한의 도발 방지와 비핵화라는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대내외적 환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 환경의 핵심은 미국의 의중이다. 2017년 북한의 미사일과 핵도발은 미국을 향하고 있었고 트럼프 정권이 대북 강경론을 유지할 명분이 됐다.

일단 북한이 미국을 안심시킬 강한 시그널을 줘야 그런 여건이 만들어질 수 있다. 실제 문 대통령은 북측이 미국과의 대화에 좀 더 힘써달라고 말했다. 대표단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이를 듣고만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을 위한 회담”과 “여건”

흔히 자유한국당 등 야당과 보수진영에서는 상호주의 전략에 따라 북한이 먼저 비핵화의 길로 나서야 협상에 나설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해왔다. 즉 북한이 먼저 행동을 보여주지 않으면 대화에 나설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대화와 압박 정책 둘 다 필요하지만 북한의 변화를 위해서 대화에 적극 나설 수 있다는 입장이다. 문 대통령은 작년 내내 북한에 대화의 손길을 내밀었고 새해벽두부터 시작된 남북 대화 국면에서 적극적으로 교류를 진전시켰다. 그 결과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여가 폭넓게 이뤄졌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을 비롯 고위급 대표단·선수단·예술단·응원단이 남한을 방문하게 됐다. 

그러나 이런 교류와 대화도 결국 안보 불안을 해소하는 성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 문재인 정부의 또 다른 원칙이다. 보수의 상호주의를 넘어서서 대화를 통한 적극적인 변화를 추구하지만 그 대화도 성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찬을 끝내고 회담을 진행하는 문 대통령과 대표단. (사진=청와대 제공)
전달받은 친서를 읽어보는 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관련해서 문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정상회담을 하려면 정상회담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야 하고 또 어느 정도의 성과가 담보돼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물론 북한도 노림수가 있기 때문에 쉽지 않다. 국제사회의 경제 제재를 완화시키는 것과 더불어 미국의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아야 하는 것이 북한의 요구조건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오찬에서 북측 대표단이 미국에 대한 평소의 입장을 되풀이했다고 말했다. 한미 연합훈련 중단 및 주한미군 철수와 같은 이야기가 나왔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이 분석했듯이 북한은 강경하기만한 미국의 입장을 되돌리기 위해서 남한을 지렛대로 삼고 있다.

결국 우리 정부가 원하는 성과와 북한이 원하는 것 사이에서 얼마나 상호 조율해서 양보하고 교환할 수 있을지가 중요하다.

김 부부장은 남북 관계 진전에 대한 바람을 청와대 방명록에 담았다. (사진=청와대 제공)
김 부부장은 남북 관계 진전에 대한 바람을 청와대 방명록에 담았다. (사진=청와대 제공)

우리 정부 입장에서는 너무 성급하게 나서면 되려 일을 그르칠 수 있다. 당장 남북 정상회담을 급하게 성사시키기 보다는 문 대통령이 언급한대로 여건 마련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김계동 건국대 초빙교수는 10일 페이스북을 통해 “핵문제와 미국의 견제 때문에 남북한 정상회담은 당장 어렵고 바람직히지도 않다”며 “1회성의 정상회담 보다는 비정치 분야부터 시작해 정치분야까지 확대시켜 나가는 대화와 관계의 제도화가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대화와 관계의 제도화를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미국과 북한의 소통이 가능할 여지도 만들어나갈 수 있다. 

김 교수는 “이 방식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때 정상회담을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문 대통령은 이번 오찬에서 여러모로 지금의 분위기를 발전시키기 위해 의지를 보였다. 문 대통령은 “(조명균 통일부 장관·서훈 국정원장을 소개하면서)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때 북을 자주 방문했던 분들이다. 이 두 분을 모신 것만 봐도 (북측 대표단이) 남북관계를 빠르고 활발하게 발전시켜 나가려는 (대통령의) 의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젊었을 때 개마고원에서 한 두달 지내는 것이 꿈이었다. 집에 개마고원 사진도 걸어놨었다. 그게 이뤄질 날이 금방 올 듯 하더니 다시 까마득하게 멀어졌다. 이렇게 (북측 대표단이) 온 걸 보면 맘만 먹으면 말도 문화도 같기 때문에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발언했다.

김 부부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강원도 강릉 스카이베이호텔에서 통일부가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 부부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이 강원도 강릉 스카이베이호텔에서 통일부가 주최한 만찬회에 참석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 부부장은 “이렇게 가까운 거리인데 오기가 힘드니 안타깝다”며 “한 달 하고도 조금 지났는데 과거 몇 년에 비해 북남관계가 빨리 진행됐다. 북남 수뇌부의 의지가 있다면 분단 세월이 아쉽고 아깝지만 빨리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특히 이날 저녁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김 부부장의 말이 의미심장했다. 조 장관이 마련한 강릉 호텔 만찬 자리에서 최문순 강원지사가 첫 서울 방문이 어땠냐고 물었는데 김 부부장은 ”낯설지가 않다“고 답해 눈길을 끌었다.

한편, 이날 김 부부장은 저녁 일정으로 만찬 외에도 남북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의 첫 경기인 스위스전을 관람했다. 단일팀은 강팀인 스위스에 0대 8로 졌다. 김 부부장은 11일 삼지연 관현악단의 서울 국립극장 공연을 관람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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