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뉴스=박광원 기자] 우상호 의원(더불어민주당, 3선)은 7일 국회서 열린 북콘서트에서 서울시장 출마 의사를 밝혔다.

우상호 의원이 7일 국회 북콘스트에서  서울시장 출마 밝혔다. 박광원 기자
우상호 의원이 7일 국회 북콘스트에서 서울시장 출마 밝혔다. (사진=박광원 기자)

우 의원은 이날 국회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자신의 북콘서트에서 마지막 인사말로 “행복지수 꼴찌인 서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시장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서울을 바꿔야겠다는 절절한 마음 뿐”이라면서 스스로의 물음에 이같이 답했다.

그는 특히 “난 세상을 두 번 바꾼 사람”이라며 “따라서 서울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 의원은 또 “제가 열심히 해서 시민들의 삶을 바꿔보려 한다”며 “새로운 사람이 하니까 내 삶이 바뀌는구나 체험을 하실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을 비롯, 김기식 전 의원, 김승남 전 의원, 문석진 서대문구청장, 김성한 전 노원구청장, 김성배 성북구청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김홍걸 대표 상임 의장 등이 참석해 북콘서트를 축하했다.

특히 박완주, 김태년, 김경수, 김두관, 백헤련, 진선미, 이철희, 김병기, 금태섭, 홍영표, 박찬대, 문희상, 송기헌, 박정, 신동근, 이인영, 이재정, 박용진, 우원식, 윤후덕, 이원욱, 유동수, 김영진, 권미혁, 김한정, 김영호, 박경미, 김한정, 김민기, 김병욱, 위성곤, 기동민, 박영선, 한정애, 홍익표, 백재현, 남인순, 박병석, 노웅래, 민주평화당 유성엽 의원 등 약 40여명의 의원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우상호 의원의 북콘스트 자리에서 서울시장 출마 밝히는 모습. 박광원 기자.
우상호 의원의 북콘스트 자리에서 서울시장 출마 밝히는 모습. (사진=박광원 기자)

[1부. 배우 우현 등장]
Q.(사회자 이재정) 책 소개?
A.(우상호) 제 살아온 이야기를 쓴 책이다. 어린시절 강원도 철원에서부터 87년 학생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생활까지 이야기를 직접 정리했다.

Q.(이재정) 우 의원님의 어린 시절, 많이 어려우셨다는데?
A.(우상호) 강원도 철원에 살다가 초등학교 6학년때 서울에 왔는데 단칸방 생활을 했다.(공동 화장실을 사용할 정도로 못살았다. 집주인이 나가라면 바로 나가야했다.

이사를 수도 없이 했다. 청소년 시절까지 가장 큰 고민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언제 벗어던질 수 있을까라는 것이다. 당시 일기를 보면 “공무원시험 준비해야” “야간 대학을 가야” 등이 적혀 있다. 반값 등록금 특위위원장을 맡은 것도 다 이런 체험 때문이다. 가난의 멍에가 너무 깊었다. 반면 우현은 의사의 아들도 태어나 풍요롭게 살았다.A.(우현) 이사를 왜 하나?(잘 살아서) 이사를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암흑기를 형(우상호)과 함께 했다. 87년 형은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다.  


Q.(이재정) 안내상씨에 대해서?
A.(우상호) 안내상 씨는 사실은 미국에서 보면 테러리스트다. 광주 미 문화원에 시한폭탄을 설치했는데 안 터졌다. 불발탄이다. 본인이 학교 뒷산에서 시험할 때는 잘 터졌다고 했다. 본인이 경찰서 가서 자신이 설치했다고 고백해서 감옥 갔다. (가끔) 드라마 보면서 웃는데 그런 친구가 학생운동 했다는 생각은 아무도 못한다. A.(우현) 불발탄이라서 CF 찍었다. “안터져요~~”

Q.(이재정) 신혼생활도 함께 하셨다는데?
A.(우현)  형은 결혼 전까지도 가난했다. 내 전세금과 안내상 전세금을 합쳐 형과 함께 살았다. 안내상과 난, 매일 밤 맨 정신에 들어갈 수 없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들어갔다.   
A.(우상호) 둘이서 매일 새벽 3시에 들어왔다. 차에 음악을 크게 틀면서 들어왔다. 온 동네를 시끄럽게 했다. 당시 윗집에는 이종석 전 통일부장관이 살았다. 맨날 성균관대 대학생들이 모여서 맨날 술먹고 시끄럽고 12시 자정이 되어 잠잠해지면 우현과 안내상이 들어오면서 온 동네를 시끄럽게 했다.

[1987년 탤런트 우현]
Q.(이재정) 87년 얘기를 해주신다면?
A.(우상호) 당시 학생운동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거다. 사진에 보면 우현이 태극기를 들고 있는 이유는 총학생회 사회부장으로 집회 맨 앞에서 전투를 주도했기 때문이다. 신학과 출신의 우현이 고생을 많이 했다. 매 집회마다 앞에서 싸워야 했다. 이한열이 피격될 때에도 앞에 있었다. 목숨을 걸고 참여했다. 이런 일을 맡아달라고 하기는 어려웠지만 본인이 인생을 혁명에 걸겠다고 했었다.


A.(우현) 대학 때는 나름 귀여웠다.(우~우) 1학년 당시 선배들이 찾아와서 교육하고 내가 2학년이 돼서는 후배들을 대려다 선배들에게 배운 대로 교육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 떠보니 감옥에 있는 걸 알았다. 


A.(우상호) 난 군대 갔다 와서 시위에 참여했다. 난 당시 우현에게 삭발할거니 아니면 밥을 굶을 거니 했더니 우현이 “난 밥은 못 굶어요”라며 삭발을 선택했다. 그래서 내가 직접 삭발해줬다. 그 당시 바리깡이 안 좋아서 많이 아파했다. 우현 미안해 
A.(우현) 감방 다녀와서 조용히 살려고 했다. 근데 형이 사회부장해야 한다며“(머리)밀어라”라고 강요했다.“밀겠습니다”라고 했다. 삭발을 시킨거다. “굶을래? 삭발할래?”이런 선택이 아니라.“밀어라!”였다.

Q.(이재정) 옥살이에 대해서도?
A.(우상호) 옥살이를 두 번 경험했다. 한번은 덕수궁 앞에서 연행됐는데 자꾸 하이바로 때리길래 맞으면서도 쳐다보며 대들었다. 그러자 다른 형사가 “어~ 이 친구 어디서 많이 봤는데? 너 이름이 뭐니?”물어보길래 “우상호요”라고 했더니 “이 친구 연대 총학생회장이네”라며 의자에 앉혀줬다. 우현은 무릎 꿇고 있고(웃음). 당시 집회와 시위는 이미 6월항쟁 때문에 처벌할 수 없어서 뉴욕타임즈와 인터뷰한 내용을 가지고 지금은 없어진 ‘국가모독죄’로 감옥에 보내졌다.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법이 없어졌다. 


A.(우현) 3학년 때 한미은행 앞에서 “미국자본주의 물러가라”라고 하다가 잡혀갔다. 잡혀가서 취조 받다가“미국 자본은 안 좋은 자본입니다”라고 했더니 “한미은행에는 미국자본이 없는 거 같은데”라고 해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말대꾸한다는 게 “잘 찾아보세요. 걔들 은밀하게 들어와”라고 했다. 3개월 있다가 나왔다. 87년에는 노태우 대선 집회에 방송국을 점거하자고 들어갔다가 구속됐다. 얼굴만 보더니 폭력배 방에 집어넣었다. 당시 방에서 폭력이 무엇인지 배운 덕분인지 그 뒤에 폭력으로 또 들어갔다.(웃음)
 
Q.(이재정) 연애사는 어땠는지?
A.(우현) 형은 연애가 없었을 겁니다. 저도 없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연애하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여자가 옆에 오면 술 먹다가 나를 지키려고 가슴에 담배빵을 했다.


A. (우상호) 우현은 당시 특정 여인과 사귀고 있었다(폭로). 비운동권 여자라 우현에게 시위 집회에 나가지 말라고 했다. 우현은 헤어지고 아픔을 이기기 위해 생각날 때마다 가슴에 담배빵을 했다. 지금도 상처가 남아 있다.
A.(우현) 당시 썸 타는 여성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기억력 흐릿) 하지만 연애하면 안되지 안돼, 어차피 감옥갈텐데 하면서 밀어내는 시기였다. (그 당시에는) 상당수의 청년들이 (그랬다). 하지만 안내상은 연애가 끊이지 않았다. 내가 아는 여성만 3명~5명이다. “이 이야기는 빼주세요 우정에 금가요”  


Q.(이재정) 1987년의 이야기 이한열 열사의 이야기, 정반대의 입장을 맡은 (우현) 감회 어떠신지?
A.(우현) 처음에 1987 영화 제작 소식 듣고 작품 활동하면서 꼭 출연하고 싶다는 간절함은 없었는데 내심 저 영화에서 나를 불러주지 않을까라는 소심한 마음은 있었다. 내가 가서 출연시켜달라고 하기에는 좀 그랬다. 마침 연락이 왔다고 해서 그쪽이 원하는 대로 해라라고 했다. 역할은 중요치 않았다. 저쪽이던 이쪽이던 내가 배우하길 잘했다 싶을 정도로 출연을 잘 했다고 생각했다. 1987 출연으로 맘에 품고 있던 것을 관철시킨 느낌이었다. 감동이었다. 맡은 역을 하는데 한 가지 어려움이 있다면 전라도 출신이라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게 힘들었다. 경상도 출신의 배우들을 쫓아다니면서 배웠다. 힘들었다.


A.(우상호) 문 대통령과 함께 봤다. 보면서 생각한 것은 이한열 어머니가 보시면 안되겠다였다. 총학생회장인 내가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어야 하는데 엄한 학생이 다쳤다는 게 맘이 아팠다. 죽었어도 내가 죽었어야 하는데 하며 괴로웠다. 누군가는 6월 항쟁을 승리(?)의 날로 이야기 하지만 난 6월 항쟁을 후배들을 지키지 못한 못난 학생회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많이 울었다. 대선 끝나고 문 대통령이 당선되던 날 다른 의원 10명과 술을 먹다 파하고 이한열 열사의 유품이 있는 연세대를 찾아갔다. 한열이와 대화했다. “한열아 잘했지. 이정도면 된 거 아니야?”한열이 죽고 한해 뒤 정권교체 실패로 빚이 있었는데 작은 빚을 감은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정권교체로 이한열의 꿈이 일부 이뤄졌다고 생각했다.

Q.(이재정) 1987 촬영한 저 사진을 찍었던 분이 원내대표 시절 직접 찾아오신 것으로 알고 있다. 어떻게 기억하고 계신지?
A.(우상호) 난 저 사진에 대해 (있었는지도) 잘 몰랐다. 우현이 찾아가지고 결혼할 때 액자로 선물해 줘서 알았다. 어디서 찾았냐?
A.(우현) 학교에서 누군가가 이야기했다. 아 이런 거는 기념적으로 보관해야겠다고 생각되어 책 속에 두고 보관했었다.

Q.(이재정) 나가기 전에 형에게 한마디 해주신다면?
A.(우현) 30년 동안 봐온 우상호는 진실되다. 솔직하다. 강하다. 온화한 이미지라고 해서 성격까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켜보면서 확인했다. 지금까지의 우상호가 틀리지 않았다면 앞으로 30년도 그럴 것이다. 뚜벅뚜벅 앞으로 나갈 것이고 승리할 것이다. 자그마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도울 것이다.  

[2부. 박완주 의원 등장]
Q.(이재정) 두 분 사이는?
A.(박완주)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난 충남 천안 국회의원이다. 우상호가 원내대표 시절 수석 부대표를 맡아 오른팔이었다. 당에서도 수석 대변인을 맡아 이때부터 수석 전문이 됐다. 명절 전에 최고위원이 됐다. 1년을 모셨던 대표이지만 (난 지금 최고위원이고 우상호는) 지금은 평의원이다. 할 얘기 다하겠다. 2017년 원대대표 시절, 나와 우상호는 ‘우박’라인이었다. 87년도를 같이 했던 강원도 촌놈 충청도 촌놈이 당을 이끌어 나간다고 하니 조금은 불안해 할 수 있는 지도부가 탄생해서 언론들이 “제1야당을 제대로 끌어갈 수 있을까”라며 걱정했다.

우리가 원하는 두 가지 목표는 통합하고 화합해서 분란 없는 당을 만들자와 대선에서 이겨보자였다. 당시에 탄핵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7~8월부터 최순실/박근혜 제보들이 들어왔다. 9월 정기국회 되면서 조웅천 의원이 대정부 질의에서 일갈했다. 이후에도 다양한 제보들이 잇따랐다. 한복과 보석을 최모씨가 갖다 바쳤다는 설부터 차은택 등 다양한 제보가 들어왔다. 우상호 하면 역시 탄핵의 주인공이다. 사실 민주당이 보통 의총을 열면 짧으면 4시간 길면 12시간(?)이다. 우상호가 원내대표가 되고 1시간 이상을 한 적이 없다. 난 우상호가 박근혜 탄핵을 이끌어 내고 조기 대선에서 승리를 이끌어낸 것에 대해 평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난 전권 수석이었다. 저를 수석으로 발탁한 것은 우상호가 가장 잘한 일이다. 
Q.(이재정) 최순실 관련 제보 7월부터 받았다고 들었는데?


A.(우상호) 8월부터 최순실 제보를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보가 다 흩어져서 들어왔다. 조각조각. 이 사람은 최순실, 이 사람은 차은택. 이 사람은 안종범 수석. BH에 있던 조웅천 의원은 “자기는 비밀유지 의무가 있어서 말 못한다”고 했다. “빨리 얘기해라”고 다그쳤더니 사실은 재벌들 돈 뜯어낸거다고 말해줬다. 손해원 의원은 차은택이 문화계를 다 해먹고 있다고 했다. 안민석 의원은 승마 비리를 얘기하고 도종환 의원은 이대 입학 문제를 얘기했다. 이거 뭔가 있다는 생각에 6명으로 TF를 구성해서 조사했다.

재벌 전경유착, 최순실 국정농단, 개인비리로 구분하고 주목도를 올려서 최순실 게이트를 터트려나갔다. 승부는 국감으로 잡았다. 천하의 박지원 대표도 모르고 있어서 국감을 미뤄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단독으로 밀어붙이면 어떻게 하냐”고 했지만 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물타기할 수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단독 국감이 필요했다. 국감은 대게 우리 의원이 발언한 뒤 다른 당 의원이 발언하면서 물타기 한다. 따라서 단독 국감은 최순실 게이트를 터트리는데 결정적 영향을 했다. 이정현 대표가 단식투쟁하다가 (국감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렇지만 다른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청와대 지시를 못 알아듣고 계속 보이콧했다. 그래서 “야, 잘됐다. 우리끼리 더하자~!”고 했다. 나중에 JTBC가 태블릿 PC를 증거로 제출하는 바람에 전국 이슈로 커졌다. 당시 박근혜에게 결정적 타격을 하긴 했으나 탄핵까지 갈 줄은 몰랐다. 박(근혜)씨를 뽑았는데, 알고 보니 최(순실)씨가 대통령이더라.


Q.(이재정) 전환점의 계기들 어찌 생각?
A.(우상호) 87년에도 6월 항쟁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탄핵할 때도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탄핵 못시키면 의원직도 던질 각오였다. 안하면 우린 죽는다는 생각뿐이었다. 세상을 바꿀 때는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 저 사진 탄핵 1일 전 표정 보면 알겠지만 비장했다. 진짜 저 때에는 나의 모든 것을 걸고 했던 것 같다. 계산하지 않고 절박하니까 되더라.

A.(박완주) 5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말 그대로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처음이다. (탄핵가결을 위해) 숫자를 맞춰야 하는데 얼굴을 보고서는 알 수 없었다. 새누리당 동의 없이 탄핵소추안의 국회가결은 불가능했었다. 그 책임은 제1야당 원내대표에게 있었다. 설득하는 과정이 엄청 힘들었다. 촛불 민심이 아니었으면 (탄핵도) 어려웠다.   


A.(우상호) 결연하게 (탄핵 안 되면 사퇴한다는) 의원직 사퇴서 작성했다. 끝까지 안 쓴 분도 계신다. (사회자) 살생부는 나중에 적절하게 쓰시는 걸로(웃음). 당시 탄핵에 참여한 새누리당 명단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명단이 새면 국정원이 바로 작업할 것을 알기 때문에 저만 가지고 있었다. 제 예상은 220표였다. 14표가 더 나와 234표가 됐다. 국회의원들은 원래 믿을 수가 없다. 새누리당 의원에게 (왜 찬성을 던졌냐?) 물어보니 자신의 일화를 들려줬다. 자기도 민간인 복장을 하고 마스크 쓰고 촛불현장에 가봤더니 자기 지역구에 보수적인 분이 와서 촛불을 들고 있다더라. 그는 내가 새누리당 당원이지만 박근혜를 뽑은 거지 최순실을 뽑지 았았다고 했다.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민주당인줄 알았는데 이것이 민심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더라. 이처럼 민심을 거역할 수 없는 흐름으로 판단해 투표한 의원들이 많다. 촛불은 민주당만의 것도 아니고 진보만의 것도 아니고 진보와 보수 모두가 함께한 투쟁이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Q.(이재정) 마지막 인사말을 하신다면?
A.(우상호) 87년 저의 도전, 2017년 탄핵 도전은 나라를 바꿔야 한다는 일념 하에 해냈다.‘나라를 바꿔야겠다’는 죽을 각오를 하고 한고비를 넘긴 것이다. 격변이 있을 때마다 끝나고 나면 겨우 하나 끝냈다 이런 한숨이 푸욱 나온다. 지도자들의 한결 같은 마음이다. 제가 북콘서트를 왜 하는지 다들 아실거다.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거다. 그것은 높은 자리에 가서 권력을 누려봐야겠다는 게 아니다. 촛불 혁명에 나오셨던 많은 국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원하고 계시는데 새로운 세상은 정책을 바꿔야 나온다. 촛불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변화를 누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서울은 어떻게 할 것인가. 행복지수 꼴찌인 서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시장이 되겠다는 게 아니라 서울을 바꿔야겠다는 절절한 마음이다. 두 번 세상을 바꿨던 사람이 서울도 바꿀 수 있지 않겠나. 제가 열심히 해서 시민들의 삶을 바꿔보려 한다. “새로운 사람이 하니까 내 삶이 바뀌는데?”라는 체험을 하실 수 있도록 하고 싶다. 이것이 제 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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