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당 혁신위의 애매한 입장, 학제개편 전제조건화는 결국 젊은 사람들이 보수정당에 표를 안 줄 것이라는 편견과 정치적 이해득실의 판단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비는 내리고 청소년들은 길바닥에 누웠다. 삭발도 했고 농성도 했다. 집회와 기자회견도 여러 차례 열었다. 이제는 직접 자유한국당 당사에 찾아가 선거권 연령 하향에 나서달라고 촉구했다. 

이날 길바닥에 누워 선거권 연령 하향을 강하게 촉구한 청소년들. (사진=박효영 기자)
5일 한국당 당사 앞 길바닥에 누워 선거권 연령 하향을 강하게 촉구한 청소년들. (사진=박효영 기자)

갑자기 옆에 있던 트럭에서 커다란 방송 소리가 들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아들 관련 병역비리 의혹을 제기하는 극우단체의 녹음 방송이었다. 무한반복으로 재생돼 행사를 방해했다. 

A씨는 청소년들을 동원하는 나쁜 어른들과 기자들을 교육시켜야 한다면서 의도적으로 행사를 방해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극우단체 관계자 A씨는 직접 마이크를 들고 “애기들 데려다가 소모품으로 쓰는 당신들 진짜 나쁘다”며 “박원순 아들 취재는 안 하고 기획된 청소년 데모꾼 취재만 하는 썩은 기자들을 교육하려고 틀었다”고 말했다. 고의로 행사를 방해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와 청소년들이 5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당 당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최근 한국당이 개헌 방침으로 선거권 연령 하향을 학제개편과 연동해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고, 제정연대는 학제개편을 선결조건으로 내건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내리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사진=박효영 기자)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이은선 대표는 만 18세 청소년으로 이번 지방선거에서 투표권이 주어져 있지 않다. (사진=박효영 기자)

기자회견과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와중에 A씨는 “이 사람들 집시법 위반이고 나쁜 어른들이 기획해 애들을 이용한 것”이라며 계속해서 행사를 방해했다. 제정연대 관계자가 “청소년을 모욕하지 말라”며 격하게 항의했고 주변에 경찰들과 취재진이 몰렸다. 

이를 바라보는 청소년들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A씨는 짜증내는 말투로 지속적으로 행사를 방해하고 청소년들을 모욕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선거권은 단순히 투표할 권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며 삭발을 감행한 권리모씨는 지난달 22일 삭발식에서 “나는 언제나 주체적이지 못 한 존재로 대우받아 왔다”며 “부모님이 시켜서도 아닌 선생님이 시켜서도 아닌 스스로 원해서 청소년 참정권을 외치기 위해 삭발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권씨는 “청소년 참정권은 <당신들에게도 있으니 우리도 달라>는 단순한 부탁이 아니다. 비주체적인 삶을 강요받는 대다수 청소년들이 주체적인 존재라는 것을 인정받는 시작점이 선거권 연령 하향”이라고 강조했다.

지난달 22일 국회 정문 앞에서 삭발을 감행한 권리모씨. (사진=박효영 기자)

실제 바로 옆에서 청소년이 직접 외치고 있는데도 A씨는 “애들”과 “꼬마들”이라고 지칭한 뒤 나쁜 어른들에 의해 동원됐고 기획됐다고 폄하했다. 기성세대의 청소년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견고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찬가지로 고등학생 신분으로는 투표를 하면 안 된다는 게 한국당의 반복된 입장이다. 학교가 정치판이 된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이런 한국당의 입장을 규탄하면서 “저희 중에는 한국당에 입당원서를 제출한 사람도 있다”며 “선거권 뿐만 아니라 개헌투표, 정당활동의 자유도 보장받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나이가 어릴수록 보수정당에 배타적이라는 편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공당으로서 청소년의 권익에 관심을 기울여주면 한국당을 지지하는 젊은 사람들도 많아질 수 있다는 취지다. 

이날 제정연대는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에게 학제개편의 전제조건화를 주제로 끝장토론을 해보자고 요구했다. 또한 황영철 의원(한국당 정치개혁소위 간사)과 면담한 결과를 공개하며 한국당 내에도 전제조건 없이 바로 선거권 연령 하향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했다. 당 지도부가 이런 목소리를 받아들여 조건없는 선거권 연령 하향에 나서달라고 압박하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의 정치개혁소위 위원들 명단. (사진=박효영 기자)

제정연대가 밝힌 발언 내용에 따르면 황 의원은 “나는 (선거권 하향) 안건상정에 단 한번도 거부한 적이 없다”며 “바른미래당의 김관영 의원(정치개혁소위 위원장)이 안건으로 제안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김관영 의원실은 사실상 양당의 간사들이 의사일정과 안건에 대해 협의하는데 한국당 측에서 계속 조건없는 선거권 연령 하향을 반대하는 입장이라 굳이 안건으로 논의할 필요가 없어서 그랬고 황 의원이 다루자고 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해명했다.

결국 한국당 지도부가 결단하는 게 중요하다. 지난달 22일 한국당의 2기 혁신위원회는 선거권과 피선거권 연령 하향이 담긴 혁신안을 발표했고 홍 대표에게 전달했다.

홍준표 대표와 김성태 원내대표의 결단만 있다면 바로 선거권 연령이 하향될 수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혁신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용태 의원은 4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제안을 하는 거고 당 지도부에서 그걸 수용할지는 거기서 판단하는 거니까”라며 당 지도부의 입장이 혁신안의 내용보다 더 보수적이고 따라서 혁신위가 수용해달라고 요구하는 모양새가 분명하다는 점을 밝혔다.

김종석 의원은 5일 기자에게 문자 메시지로 “혁신위는 자문기구다. 건의 내용을 수용하는 것은 당의 권한”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혁신위의 건의 내용이 정확하게 학제개편을 조건화 한 선거권 연령 하향인지 그렇지 않고 선제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기자는 김 의원에게 학제개편을 조건화한 선거권 연령 하향에서 선제적으로 혁신위가 당 지도부에 요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김 의원은 “저희(혁신위)는 당연히 선거구제 개편과는 별개로 선거연령 하향은 저희 입장이었고 명문화해서 혁신안에 담은 것이니까 지도부에서 잘 판단할 것”이라고 답했다.

학제개편이 아닌 “선거구제 개편과는 별개로”라는 표현이 나왔지만 질문에 대한 답변은 흔쾌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만큼 긍정적이었다.

명확하진 않지만 혁신위가 당의 입장과는 다르게 요구하더라도 현실적으로 한국당이 입장을 쉽게 전환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파이낸셜 뉴스가 지난달 22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전지명 한국당 혁신위 운영총괄간사는 “우선 혁신위가 선거연령을 낮추는 방안을 당에 제시한 것”이라며 “당 지도부 결정을 지켜봐야겠지만 6월 지방선거에서 바로 적용시키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 싶다”고 전망했다. 

청소년이 직접 한국당 관계자에게 끝장토론 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박효영 기자)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에서 공동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는 배경내씨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박효영 기자)

관련해서 정확한 지도부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김성태 원내대표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한편, 이날 당사에서 자유한국당 국민소통센터 관계자 2명이 내려와 제정연대의 요구서를 받아 갔다. 제정연대의 배경내 공동집행위원장은 요구서를 전달하겠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이미 수 차례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전화도 하고 접촉을 했지만 한국당은 어떤 답변도 주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따라서 이 요구서가 접수되면 정확하게 어떤 과정으로 논의되는지 또 언제 답변을 받아볼 수 있는지 알려달라고 요구했다. 관계자 B씨는 꼭 연락을 주겠다고 했지만 언제 연락이 갈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답을 줄 수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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