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김의 종언, 한 시대 막을 내려, 정치 이합집산과 연합의 달인, 군인 출신 엘리트 정치인, 한국 정치를 쥐락펴락한 협상가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DJ(김대중), YS(김영삼), JP(김종필). 3김 시대. 한국 현대 정치사를 풍미했던 3김이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했다. DJ는 2009년 8월18일, YS는 2015년 11월22일, JP는 2018년 6월23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8시15분 세상을 떠났다. 1926년생으로 93세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이날 김 전 총리는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의식을 잃어 119 구급차에 호송돼 순천향병원으로 향했으나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1989년 1월년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사진=연합뉴스 제공)
1989년 1월경 서울 마포가든호텔에서 만난 3김. 왼쪽부터 당시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 전 총리는 1926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고 공주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사범대와 육군사관학교를 거쳤다. 김 전 총리는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군사 쿠데타를 주도한 뒤 항상 한국 정치사의 지배적인 자리에 있었다. 김 전 총리는 2016년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의 대권 행보를 지지한 것까지 55년 간 활약했다.

1963년 6대 총선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7·8·9·10·13·14·15·16대까지 총 9선을 지냈다. 흔히 김 전 총리를 두고 “대통령 빼고 다 해 본 사람” 또는 “영원한 2인자”란 말을 한다.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을 만큼 정치적 킹 메이커를 수행했지만 자신은 최고 권좌에 오르지 못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 때인 1971년 처음으로 국무총리직을 역임했고 1987년 민주화 이후 신민주공화당 소속으로 13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3김 분열에 따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결과를 불렀다.

1990년 2월9일 14대 대선을 2년 남긴 시점에서 3당 합당(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을 통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했고 김 전 총리는 민자당의 한 축으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당선을 위해 적극 지원했다. 1995년 2월에는 신민주공화당계 인사들과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1997년 15대 대선 때는 자민련 후보로 한 번 더 도전했지만 막판에 ‘DJP(김대중·김종필·박태준) 연합’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단일화했고 최초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성공시켰다.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의 출범을 발표하고 있는 노태우 전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제공)

16대 국회에서 의원내각제로 개헌을 추진하기로 약속했고 실세형 총리직도 보장받는 등 빅딜로 공동 정권을 탄생시켰던 김 전 총리는 경제 관련 부처의 장관 임명권까지 갖기도 했지만 끝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사이가 멀어졌다.

이후 김 전 총리는 2004년 17대 총선에서 10선에 도전했지만 낙선했고 공식적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과거처럼 정치 일선에서 활동하진 않았지만 중요한 날마다 주요 정치인이 김 전 총리를 예방할 정도로 정치계 원로로 남아 있었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올해 1월3일 새해를 맞아 김 전 총리를 찾았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김 전 총리는 2008년 12월 뇌중풍으로 건강이 악화된 이후 자택에 머물며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2013년 12월10일 5년 만에 국회를 찾았을 때 김 전 총리는 연설을 통해 “이제 갈 곳은 죽는 곳밖에 없는데 국립묘지에 가지 않고 우리 조상이 묻히고 형제들이 누워 있는 고향에 가서 눕겠다. 누구나 늙으면 병이 생기고 병이 생기면 죽는 경로를 밟는데 나는 생로병사 중 생로병까지 왔다”고 밝혔다.

김 전 총리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저작권자 © 중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