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복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사진=신현지 기자)
이광복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사진=신현지 기자)

[중앙뉴스=신현지 기자] 한국문단의 현주소를 진단한다면 그 위상이 상당히 실추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원인이야 다양하겠지만 가장 큰 맹점은 그동안 정부가 문단을 등한시 해왔다는 것이 문단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즉 이는 내년 27대 차기 문인협회이사장에 거는 회원들의 기대가 자못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본지는 27대 차기 (사)한국문인협회 이사장 후보 중 한 사람인 문인협회 이광복 부이사장과의 만남을 가졌다. 

1975년 문협 편집부 기자를 시작으로 2005년 문협 편집국장, 2007년 문협 소설분과회장, 2011년 제25대 문협 부이사장 겸 상임이사에 이어 2015년 제 26대 재선으로 부이사장 겸 상임이사에 재직 중인 그가 문협의 정통성을 가진 인물로 차기 이사장 후보에 초미의 관심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 본 얼굴은 절대 잊지 않는다.” 
 
이 부이사장을 아는 사람이면 모두 그의 탁월한 기억력에 혀를 내두른 만큼 역시 그는 자리에 마주 앉기도 전에 언제 스쳤는지 기억나지 않는 만남을 기억하며 자리를 편안하게 리드한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극빈자 중 상 극빈자, 큰집의 양자로 출생의 혼란...

“내 고향은 충남 부여,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우했다. 극빈자 중 상 극빈자였으니. 더욱이 난 종가(宗家)의 대(代)를 잇기 위한 인습(因習)에 큰집에 양자로 입적되어 어린 시절 한동안 혼란을 겪기도 했다. 젖 떨어지자마자 큰집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문학의 계기, 초등학교 때 밤마다 읽어드린 고전에 마을어른들 날 새는 줄 몰라...

“문학의 계기는 아주 어릴 적이었다. 그러니까 큰아버지는 글을 아셨다. 그 덕분에 난 여섯 살 때 한글을 전부 깨우친 뒤 일곱 살 때 천자문을 떼었다.

그리고 여덟 살 때 석양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우리 집으로 마실 오는 동네 어른들에게 얘기책을 읽어 드렸다. 가물가물한, 석유등잔 불빛 아래에서 『춘향전』『심청전』『흥부전』『유충열전』『장국진전』 따위를 읽어드릴 때면 동네 어른들은 내 이야기에 빠져 울고 웃느라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어른들은 내게 ‘수재’니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과분한 칭찬들을 하며 밤마다 우리 집으로 몰렸다. 그러니 내게 문학의 계기를 묻는다면 그때부터라고 해야 맞겠다.”
 
초등학교 들어가지 전 한글과 천자문을 떼 동네 어른들에게 고전을 줄줄 읽어주던 소년, 천재, 수재라 불리던 소년. 그러나 가난은 고등학교 진학마저 고민하게 했다고... 눈길을 넌지시 창밖에 두는 그의 얼굴빛에 설핏 고단함이 엿보인다.

이광복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사진=신현지 기자)
목동에 위치한 문협사무실에서 업무 중인 이광복 (사)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사진=신현지 기자)

가난에 쫓겨 18세에 서울로 상경...깡으로 버틴 20대에 문학의 꿈 이뤄
 
“양가(養家)와 생가는 빤히 건너다보이는 200m 쯤의 거리였다. 큰아버지는 사방공사(沙防工事) 감독으로, 큰어머니는 삯바느질로 근근이 연명했다. 생가는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역시 가난하기는 마찬가지. 부모님은 엄청 부지런했지만 가난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 중학교도 어려웠다. 아버지의 큰 결단에 장리쌀을 현금으로 바꿔 들어간 중학교였다. 학교 성적은 늘 상위권이었다. 그런데도 고등학교는 생각도 말아야 했다.

성적순에 입시반에 들었지만 보충 수업비를 낼 형편이 안 돼 고등학교를 작파하려 했다. 그때 내 형편을 아신 담임의 천거로 조합장 아르바이트와 근로 장학생으로 수업료 면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고교시절 내내 난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다. 그렇다고 대학을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난 대학 대신 공무원 시험을 겨냥했다. 그런데 호적상 나이가 두 살이나 줄어 응시자격에 미달이었다. 자식 셋을 괴질로 연속해서 잃은 아버지가 그것을 염려해 내 호적신고를 2년이나 늦게 했던 탓이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막노동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하던 그 해 여름,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처음 내린 곳은 영등포역, 그때부터 ‘깡으로’ 버티면서 피눈물 나는 세파와 정면대결을 벌였다. 고생은 살인적이었다. 죽을 생각도 숱하게 했다. 그때마다 문학이란 꿈이 나를 버티게 했다. 어디를 가든 문학 서적만은 보물단지 안 듯 끌어안고 다녔다.

그렇게 갖은 고생 끝에 잡지사에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호적상 나이 18세가 되던 해였다. 이때부터 원고지와 함께 문학수업에 박차를 가해 23세에 문화공보부의 장막희곡 부문에 입상을 했다.

이어 1974년 신동아 당선과 더불어 76년 현대문학 초회 추천과 77년 현대문학 완료 추천으로 20대에 문학의 성과를 이루었다. 이는 문단 생활 내내 최연소 기록 행진이기도 했다. 그러니 가난이 나를 일찍 소설가로 만들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겠다.”  

살인적인 가난을 딛고 20대에 문학의 꿈을 이뤄 한국문단에 외길을 걸어 온 이광복 부이사장, 그동안 그는 소설 창작집, 장편소설, 기타 교양서적 만해도 30여 권이 넘는다.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과는 상관없이 가난은 숙명처럼 늘 그를 고단하게 했다고. 그리고 그때마다  지난 세월의 쓰라렸던 나날을 돌아보며 스스로에게 매서운 채찍을 가했단다. 그러면서도 문학단체의 중심에서는 늘 ‘을’로 살기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문인이 문인을 존중하지 않으면 독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없어...‘을’ 자처

“나에게는 분명한 사상과 철학이 있다. 문인이 문인을 존중하지 않으면 문인은 독자와 다른 계통의 종사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때문에 나 자신부터 선후배 문인들을 존중하며 늘 ‘을’이 되어 다른 문인들을 ‘갑’으로 섬겼다.

특히, 문학단체 안에서 직위(職位)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한껏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었다. ‘을’이 ‘갑’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일찍이 터득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어머니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학벌 높은 사람들을 뺨치고도 남을 만큼 언변(言辯)이 뛰어났다.

또 남달리 인정 많고 유식했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뇌리에 콕콕 들어와 박혔다. 동기간(同氣間)에는 콩 한 톨도 나누어 먹어라. 이웃과는 소 한 마리를 가지고도 다투지 마라. 누가 해코지를 하거든 맞붙어 싸우지 말고 차라리 얻어맞아라. 참아라, ‘참을 인(忍)’자(字) 세 번만 생각하면 살인도 면한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했으니, 괴로움을 잘 견뎌내면 언젠가는 반드시 즐거움이 생길 것이니라 등등.” 

이 같은 섬김의 사고를 가진 그가 차기 27대 문인협회 이사장에 출사표를 던졌으니 그의  각오와 생각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문협, 1만3800여 명의 회원과 국내외에 18개 지회와 178개 지부로 한국문단의 구심적 

“우리나라에는 여러 문학 단체가 있다. 하지만 문학 단체라고 해서 똑같은 문학 단체가 아니다. 문학 단체는 역사와 전통, 성격과 규모에 따라 그 위상과 역할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 중 문협은 현재 1만3800여 명의 회원으로 조직이 방대하다. 국내외에 18개 지회와 178개 지부를 두고 있다. 이렇듯 중량급 몸집을 가진 문협은 1968년에 창간한 기관지 ‘월간문학’ 외에도 계간지 ‘한국문학인’을 통해 회원들에게 작품 발표의 지면을 제공하는 한편 한국문학심포지엄, 마로니에전국청소년백일장, 전국대표자대회, 각종 문학상 등 실질적으로 한국문단을 이끌고 있다.

그런데 이 방대한 활동을 회원의 회비로 운영된다. 일부 사업의 경우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로부터 약간의 지원금을 받는데 우리나라의 문학진흥정책이 얼마나 공허하고 유명무실한지 정부의 지원은 있으나 마나하다.”

그동안 오랜 세월 한국문단의 집행부 자리에서 문단 실정을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고 있다는 그의 얼굴에 다소 노기마저 비친다. 문단을 등한시하는 정부에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다.
   
‘문예위’ 지원 문인 1인당 3000원 남짓... 실추된 문단에 새바람 필요
 
“지난해 문예위가 문협에 지원한 연간 예산이 ‘월간문학’ 원고료 2400만 원, 문학주간 한국문학대축전 행사 670만 원, 아카이빙 사업 1320만 원으로 총 4390만 원이었다. 이는 회원 1인당 3000원 남짓한 금액이다.

그러니 문단의 위상이 땅으로 떨어지고 문인들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어느 나라든 문학을 무시하고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 우리나라 현재 실정이 그렇다.

그동안  문협은 이 원칙 없고, 일관성 없고, 객관성까지 결여된 문예위의 ‘기간문학 단체활동 지원사업’에 대해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런저런 예산 핑계로 그나마 지원이 끊길 거라는 둥 허탈한 동문서답만 보내오고 있다.

이에 자존심 강한 문인들 사이에서는 아예 그 ‘눈곱만 한’ ‘병아리 눈물 같은’ 지원 자체를 거부하자는 목소리까지 불거져 나온다.

이런 사정을 모르는 항간에선 한국문학을 사정없이 질타한다. 한국문학은 어찌하여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느냐는 핀잔이다. 노벨문학상을 받을만한 여건 조성은 고사하고 문학이 설 자리를 잃어 점점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데도 앞뒤 가리지 않고 그런 꾸지람만 해대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니 하루빨리 실추된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문인들의 자존심을 되찾고 한국문단의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생일대의 변곡점(變曲點)행복의 전도사로...매사 긍정적인 사고
 
정부의 형편없는 지원을 질책하는 그의 목소리가 다소 격앙된다 싶었는데 금세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러니까 그는 매사에 조급하지 않다고 한다. 이는 그의 나이 45세 때 신(神)의 축복인 듯 놀라운 ‘기적(奇跡)’의 체험이었다고. 천주교 신자이기도 한 그는 긍정적인 사고를 신의 놀라운 섭리로 돌린다. 

“내면(內面)의 변화였다. 어느 한순간 내 삶이 무척 행복하게 느껴졌다. 그동안 가난이 벼랑 끝까지 몰아 그때마다 죽을힘을 다해 견디느라 내 얼굴은 늘 우는 상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불행을 뛰어넘어 행복으로 치닫는 일생일대의 변곡점(變曲點)이었다. 그때가 1995년이었다.

갑자기 내 내면에 어떤 스파크가 일어 날 행복으로 인도했다. 그때부터 모든 일이 막힘없이 술술 풀렸다. 그해 연말 두 번째 대통령표창과 제14회 조연현문학상(趙演鉉文學賞)을 받았다. 그 뒤로 나의 이런 긍정적인 사고는 마침내 행복의 전도사가 되게 했다.

여러 사람에게 행복의 가치와 의미를 널리 전파하는 가운데 더 큰 행복을 예감하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리리라 생각한다.” 

 문학지원극대화와 한국문단의 위상에 부단한 노력

끝으로 그의 계획을 묻자 이광복 부이사장은 자신의 런닝메이트와 함께 한국문단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나는 1992년 제19대 집행부 최연소 이사로 선임된 이후 제23대까지 연임했고, 2007년 제24대 소설분과회장 당선을 거쳐, 2011년 제25대 최연소 부이사장에 이어 2015년 제26대 부이사장으로 재선됐다.

더불어 현재 문체부 문학진흥정책 위원회 위원과 국립한국문학관 건립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니 아무래도 문학지원극대화에 유리한 위치가 아닐까 싶다. 앞으로 한국문단의 위상을 올려놓는 일에 부단히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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