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전 대 열 大記者. 전북대 초빙교수

[중앙뉴스=전대열 칼럼니스트]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 대해서 치안유지를 생명으로 하는 정부에서는 가둬두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다. 범죄의 질과 양에 따른 처벌을 우선적으로 하는 것이 응보형(應報刑)이며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도록 교정활동을 강화한 것이 교도형(矯導刑)이다.

곤장으로 때리거나 감방에 가두거나 멀리 귀양을 보내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범죄자를 처벌하게 되는데 살인이나 국가반역의 죄를 저지르면 사약 총살 교수 또는 가스형으로 사형이 집행되기도 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에는 많은 형무소가 생겼다.

전근대적이었던 조선시대의 전옥(典獄)이 현대적인 감옥으로 변한 것이다. 형무소가 교도소로 변한 것은 광복 이후인데 민주주의를 내세웠던 한국정부 역시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등 철권을 휘둘렀던 독재자들은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와 영구집권에 저항하는 민주세력을 뿌리 뽑기 위해서 가차 없이 고문과 투옥으로 정권을 유지했다. 그로 인해서 4.19혁명과 5.18민중의거는 수백 명의 희생자와 엄청난 부상자를 냈다.

말할 나위도 없이 조선을 강탈한 일제 침략자들은 조선민중의 궐기를 약화시킬 목적으로 걸핏하면 조작된 옥사를 일으켰으며 조그마한 잘못이라도 발견되는 즉시 침소봉대로 덮어 씌워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삼았다. 일제 치하에서 가장 무서운 말의 하나가 “순사 온다.”였다. 우는 아기도 이 말을 들으면 얼굴이 샛노래지며 금세 울음을 그쳤다. 공포와 불안의 나날이 조선민중 생활의 전부였다. 형무소에 한 번 들락거리면 호적에 빨강 줄이 처진다. 전과자다. 취업 사업 등 모든 사회생활과 단절된다.

억울하게 잡혀간 사람이 많았지만 독립운동을 한 지사에 대해서는 더욱 혹독했다. 1910년 우리는 국권을 빼앗겼다. 1905년 이미 을사늑약을 통하여 외교권을 강탈당한 5년 후다. 뜻있는 선비들은 자결하거나 의병을 모아 무력으로 맞섰다. 이들은 일제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화승총이나 죽창을 들고 나선 의병의 병력차이는 너무나 컸다.

장열하게 전사하거나 붙잡혀 고문을 받고 투옥되어야 했다. 일제하 형무소는 1919년 3.1만세운동,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독립 운동가들의 단골이 되었다. 한 번 잡혀 들어갔던 애국지사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딱지가 붙은 채 요시찰 명부에 이름을 올렸으며 시도 때도 없이 예비 검속되거나 언제나 감시의 대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관순은 고문으로 죽었고 김창숙은 앉은뱅이로 평생을 살아야 했으며 안창호 역시 후유증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 와중에 민족의 지도자로 추앙받던 분들이 일제의 장기화와 회유로 독립에 대한 자신감을 상실한 나머지 말년을 친일행위로 돌아서는 씻을 수 없는 죄과의 구렁텅이에 빠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1945년 꿈에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이했으나 미 소 양대 강국의 국제정치 농단에 휘말려 38선으로 갈라져야 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으로 이를 극복하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미 각기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장준하는 학병으로 끌려갔으나 과감히 탈출하여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김준엽 노능서와 함께 한국 상륙작전을 꾀하던 미군의 OSS대원이 되어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 원자탄에 놀란 일본의 조기항복으로 임시정부가 ‘참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은 통탄지사(痛歎之事)다. 상륙작전이 실행되었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당당한 참전국의 일원으로 조국분열의 망동을 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장준하는 이범석과 함께 귀국하여 민족청년단의 일원으로 활동을 개시했지만 철기 이범석과 의견을 달리하자 단연코 ‘족청’를 탈퇴한다. 6.25사변이 터지자 피난지 부산에서 아내 김희숙과 리야카에 원고뭉치를 싣고 다니며 월간 사상계를 창간하여 자유당 시절의 매말랐던 문화와 학문 그리고 교양을 증진시키는 매스미디어의 문을 활짝 연다.

당시 대학생 등 청년들은 사상계를 옆구리에 끼고 다녀야만 지식인 축에 낀다는 평가를 들을 만큼 유행이 되어 공전절후의 인기를 누렸다. 이승만정권의 불법부정을 과감하게 규탄한 것은 사상계와 동아일보였으며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사상계를 부완혁에게 맡기고 정치에 뛰어들어 8대국회의원이 된다. 한일협정과 삼선개헌에 반대하고 10월유신이 선포되자 양일동 정화암 김홍일 윤제술 유청 등 독립운동 원로들과 함께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고 유신헌법개정을 청원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가 투옥되는 등 파란만장한 정치활동을 전개한다.

그가 1975년 8월17일 약사봉 등산길에 사망한 것은 ‘암살’의 의구심이 두드러졌으며 40년이 흐른 후 유골을 감정한 법의학교수는 두부함몰이 외부가격에 의한 것이라고 의과학적인 결론을 내렸으나 목격자의 함구로 지금까지도 ‘암살진상’을 밝히지 못하고 있어 죄를 짓는 느낌이다.

장준하탄신 100년을 맞이하여 서울시와 포천시에서 장준하역사 기념관 등 추모행사를 준비하고 있으며 8월4일부터는 장준하가 긴급조치로 징역을 살던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 일생을 되돌아보는 특별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부영 유광언 김도현 안병원 조민 전대열 등 기념사업회 운영위원들과 장남 장호권 그리고 역사관을 운영하는 서대문구청장 문석진 등이 참석했다. 이준영이 전시물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위대한 족적을 남긴 애국지사의 향기가 넘쳐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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