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 불충분이라고 법적 판단, 피해자에 대한 편견으로 재판했을 가능성, 입장이 번복된 안희정 전 지사

[중앙뉴스=박효영 기자] 여성계는 잔뜩 화가났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기자들에게 “국민 여러분 죄송하다. 부끄럽다. 많은 실망을 드렸다. 다시 태어나도록 노력하겠다. 부끄럽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조병구 부장판사(서부지법 형사합의11부)는 14일 11시 즈음 안 전 지사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죄(형법 303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안희정 전 지사는 다시 태어나겠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검찰은 7월27일 열린 결심공판에서 징역 4년과 성폭력 치료수강 및 신상공개 명령을 구형한 바 있다. 

안 전 지사는 선고공판이 끝나고 법원을 나오면서 기자들에게 간단히 심경을 전했고 여성단체와 일반 시민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크게 소리치고 항의했다. 반면 안 전 지사의 지지자들은 “완벽한 무죄이고 무고죄”라며 맞대응했다.

그동안 꾸준히 공판에 참관해 진행과정을 지켜본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는 무죄 선고 직후 페이스북을 통해 “선고공판에 그동안 본 적 없는 안희정 지지자들이 왔다. 선고 후 법원 앞에서 안희정 파이팅을 외치길래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어서. 뭘 파이팅 하라는 거야? 뭘 지지하는데? 성폭력에 대해 파이팅이야? 그거 지지해? 안희정의 지지자들에게 소리질러서 목이 다 쉬어버렸다. 이 재판과정 전체가 위력이 행사되는 장이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판결의 주심판사 이름은 조병구다. 양승태 사법농단의 입이었던 대표 적폐 판사”라며 1심 판결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14일 오전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열린 안희정 전 충남지사 1심 무죄 선고에 대한 기자회견에서 안희정 성폭력사건 공동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조 판사의 판결 근거를 주목해보면 “피고인이 유력 정치인이고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거론되며 도지사로서 별정직 공무원인 피해자의 임면권을 가진 것을 보면 위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점을 기본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반적인 사정을 고려할 때 김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했다고 보기 어렵다. 피해자의 진술에서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나 의문점이 많다. 피해자가 심리적으로 얼어붙은 해리상태에 빠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검찰의 공소사실의 뒷받침이 부족하다. 현재 우리 성폭력범죄 처벌 체계 하에서는 이런 것만으로 성폭력 범죄라고 볼 수 없다”며 구성요건으로서 위력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판시했다.

한 마디로 위력 관계는 인정될 수 있지만 실제 위력이 행사됐다고 볼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안 전 지사는 자신의 정무비서였던 김지은씨에게 2017년 7월29일부터 2018년 2월25일까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4회·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1회·강제추행 5회를 저지른 혐의로 올해 4월 불구속 재판에 넘겨졌다. 

안 전 지사는 짧게 소감을 말하고 바로 현장을 떠났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안 전 지사는 짧게 소감을 말하고 바로 현장을 떠났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조 판사는 “정상적 판단력을 갖춘 성인남녀 사이의 일이고 저항을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 강제력이 행사된 구체적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는데 이는 강간죄(형법 297조)에 해당하는 것이다. 김씨도 폭력과 협박으로 성관계에 이르지는 않았다고 인정했다. 

무엇보다 조 판사는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사실상 유일한 증거는 피해자의 진술인데 증거조사 결과에 따르면 위력으로 피해자를 억압해 왔다고 볼만한 증거는 부족하다”며 안 전 지사 측의 진술과 증거들을 모두 인정해서 판단을 내렸다. 

예컨대 “맥주를 들고 있는 피해자가 외롭고 안아달라는 말을 했고 간음이 있은 후 순두부 식당을 찾으려고 애쓴 점, 피해가 발생한 날 저녁 피고인과 와인바에 간 점, 피해자가 한국으로 돌아와 피고인이 이용하는 미용실을 찾아가 같은 미용사에게 머리손질을 받은 점, 굳이 가식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어보이는 지인에게도 피고인을 지속적으로 지지하고 존경한다는 태도를 보인 점 등을 비춰봤을 때 피해자의 주장은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밝혔다.

안 전 지사는 이날도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안 전 지사는 이날도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하지만 가스라이팅(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의심을 불러일으켜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시키고 지배력을 행사) 성범죄와 그루밍 성범죄(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호감을 얻거나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가 공론화되고 있고 특히 성범죄의 특성상 지인에 의한 범행이 많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 사건 전후로 우호적인 소통이 오갈 수 있고 평범한 일상적 경험이 있을 수 있다. 

즉 단순히 사건 전후로 피해자와 가해자 간에 우호적인 소통이 있었다고 해서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이 침해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 조 판사는 “혹여나 피해자가 성적인 길들이기로 이른바 그루밍 혹은 학습된 무기력 상태와 같은 심리상태에 빠진 것은 아닌지. 정신적 해리 상태이거나 심리적 얼어붙음과 같은 현상을 겪은 것은 아닌지. 부인과 억제의 방어기제를 통해 버텨온 것은 아닌지 살펴봤으나 제반 증거를 봤을 때 피해자가 이러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안 전 지사는 부적절한 성관계에 대해서만 사과의 입장을 밝혔고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안 전 지사는 부적절한 성관계에 대해서만 사과의 입장을 밝혔고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그러나 김씨는 이날 무죄 선고 직후 입장문을 내고 “재판정에서 피해자다움과 정조를 말할 때 어쩌면 미리 예고됐던 결과였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굳건히 살고 살아서 안희정의 범죄 행위를 법적으로 증명할 것이다. 권력자의 권력형 성폭력이 법에 의해 정당하게 심판받을 수 있도록 끝까지 싸울 것”이라며 성폭력 피해자에 대해 전형적인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재판부의 판단을 반박했다.

결론적으로 조 판사는 결심공판에서 안 전 지사가 “사건 초기 내가 받은 의혹을 인정하고 주저 앉았다. 할 말이 많았고 사실과 다른 것도 많았지만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꼭 말하고 싶었다. 나는 지위를 가지고 위력을 행사한 바가 없다. 어떻게 지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인권을 빼았겠나. 나 역시 고소인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 못 할 갈등을 겪었고 그런 관계를 가지게 한데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며 최후진술 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3월5일 저녁 jtbc <뉴스룸>에서 김씨가 안 전 지사에 대한 미투 폭로를 했고 그날 자정이 넘은 시각 안 전 지사는 페이스북에 “무엇보다 나로 인해 고통받았을 김씨에게 정말 죄송하다. 내 어리석은 행동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는 비서실의 입장은 잘못이다. 모두 다 내 잘못”이라며 사실상 의혹을 인정했는데 기소된 이후에는 합의에 의한 관계로 다시 입장이 전환됐다.

안 전 지사가 폭로 직후 사실상 혐의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글을 올렸다. (캡처사진=안희정 전 지사 페이스북)
<뉴스룸>에서 공개된 안 전 지사의 카톡 메시지를 보면 사실상 혐의가 인정되는 대목이 있다. (캡처사진=jtbc)

그럼에도 <뉴스룸>을 통해 공개된 카카오톡 대화 일부를 보면 안 전 지사는 “내가 스스로 감내해야 할 문제를 괜히 이야기했다”거나 “괘념치 말거라”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안 전 지사 스스로 김씨가 원치 않는 성관계를 자행한 뒤 이를 달래면서 그 행위를 인정하는 듯한 맥락으로 추측되는 메시지를 답장이 없었음에도 7통이나 보냈다. 

한편, 여성계의 반발 분위기는 매우 강렬한 상황이다. '안희정 무죄판결에 분노한 항의행동'이 임시적으로 조직됐고 이날 19시 서울 서부지법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기로 했다. 

손석희 jtbc 보도부문 사장과 취재진은 안 전 지사가 무죄 판결을 받음으로써 어떤 입장을 밝힐지 주목된다. (캡처사진=jtbc)

여성학자 손희정씨는 페이스북을 통해 “위력에 의한 성폭력이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인정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판결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수많은 권력형 범죄가 묵과될 것이다. 이 판결은 법리적 판단에 의한 판결이라기보다 너희들이 떠들면 떠들수록 더욱 강하게 짓밟고 더욱 무력하게 만들겠다는 정치적 선언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반면 안티 페미니즘을 주장해왔던 박가분 작가는 페이스북에서 “안희정 판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은데 당연히 무죄가 나오리라 예상했던 나로서는 별로 놀랍지 않다. 다만 이번 판결을 기해 손석희식 저널리즘이 1패를 적립한 것은 확실”하다고 강조했고 결국 성폭력에 대한 것은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jtbc의 최초 보도에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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