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봄샘 기자

 

풋잠

지하선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처럼 잠의 문 살짝 열렸습니다

깜박, 눈 한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재바른 마파람이 한평생을 물고 날아가 버렸습니다

 

풋감처럼 떫은 날엔 욕심껏 쟁여 두었던 것들

자랑하며 우쭐거렸습니다

닿을 듯 잡힐 듯 감나무 우듬지 매달린 사랑 할 알까지도

내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붉게 농익은 노을이 어둠으로 떨어지던 날

그 모든 것들도 억겁 벼랑으로 스러져갔습니다

 

소중하다고 싸매두었던 화사한 봄날

이제야 꺼내 보니 조등에 걸린 허무

남가일몽이라 했습니다

 

 

- 지하선 시집 『잠을 굽다』(2018. 미네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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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일장춘몽에 비유하는 말이 떠오르게 하는 시다. 기쁨도 슬픔도 미움도 사랑도 죽을 것 같던 절망과 고통의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기억 속의 풋잠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어느 정점에서 돌아보는 화자의 시선에 겹쳐서 바라보니 나의 삶도 한갓 풋잠이었음을 느낀다. 참 욕심도 욕망도 눈물과 웃음의 순간들도 꿈인 듯 아련하다. 아둥바둥거리며 살아온 발자국들이 어지럽다. 철없던 풋사랑이 그리워지고 풋풋했던 풋내기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풋’이라는 단어 참 매력있는 말이다. 풋이 들어간 낱말들은 왠지 악의적이지 않다는 게 나 개인적인 느낌이다. 갓 들어 깊이 들지 못한 잠, 풋잠 같은 인생의 덧없음을 토로하며 시인은 화사한 봄날을 돌아본다. 그리하여 조등에 걸린 허무, 남가일몽이라고 정리한다. 진정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조곤조곤 속삭여주며 꽉 움켜진 손의 힘을 살짝 빼게 해 주는 시, 세상의 모든 풋들에게 던지는 잠언 같은 시의 여운이 깊다.

[최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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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선 시인 /

2008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 『소리를 키우는 침묵』 『미지의 하루에 불시착하다』 『잠을 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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