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 소설가
이재인 전 경기대 교수 / 소설가

[중앙뉴스=이재인] 농가에서 없어서는 안 될 두 가지 농기구가 있다. 낫과 호미가 그것이다.

밭에다 씨앗을 묻기 위해서는 호미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김을 매거나 밭이랑을 고르는데도 호미가 필요하다. 잡초가 고개를 내밀 때에는 호미 등으로 잡초를 긁으면 제거효과가 대단하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 서재에 가면 어느 조각가가 선생한테 호미를 부조하여 선물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원주로 낙향하여 밭에서 채소를 가꾸는 모습을 보고 만들어 보냈다 한다. 이를 보곤 필자도 그 조각가의 안목에 그만 찬사를 보낸 일이 있다.

어제는 농기구 창고를 정리하면서 지난여름부터 긴긴 동면에 들었던 전통 낫을 찾아냈다. 그렇지……. 나는 밭둑에서 춘정을 느끼고 머리를 내밀려고 기지개를 켤 머위를 생각했다. 지난 여름이후 우거진 풀을 제거하기 힘이 들어 그대로 방치했었다.

이제 묵은 풀을 베어야만 입맛을 돋우는 머위나물이 고개를 내밀 것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농기구 창고에서 낫을 찾아냈다. 지난해 쓰던 대장간 전통 낫이 붉게 녹이 슬어 나의 게으름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필자가 어릴 적에 농사를 짓는 농부의 농기구가 녹이 슬면 이는 마을에서 손가락질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농자는 근면해야 한다는 진리이다. 게으른 사람한테는 소작농도 차례가 가지 않았다. 지주입장에서 게으른 이에게 소작을 주면 소출이 적으니 당연한 처사였으리라….

나는 우물가에서 먼지 앉은 숫돌을 씻어냈다. 낫이나 칼을 사용하는 농가에서 숫돌이 없이는 안 된다. 풀을 베기 위해서는 낫을 시퍼렇게 날을 세워야만 풀이나 나뭇가지를 잘 제거할 수 있다.

숫돌은 성근 것과 결이 고운 것 두 가지가 있다. 무쇠 낫을 갈거나 칼에는 성근 숫돌이 제격이다. 그러나 가위나 소채를 자른 숫돌은 결이 곱고 판판한 숫돌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천조각에 흠결이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급해도 서두르지 않아야 제대로 된 날을 세울 수 있다. 순자(荀子)의 ‘성악(性惡)’편에 지려능리(砥厲能利)라는 말이 있다. ‘고운숫돌에 갈아야 날카롭게 할 수 있다’라는 뜻으로 명품이란 끊임없는 단련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칼을 갈거나 낫을 가는 사람을 보면 그가 어떤 자세로 가는가에 우열이 드러난다. 칼은 날이 하나이다. 그러니까 결을 따라 숫돌에 밀면 날이 시퍼렇게 선다. 가위를 갈을 때에는 또 다른 기술과 내공이 따른다. 가위는 날이 서로 맞물려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날을 일정한 각도로 갈아야 한다. 그러면 칼날이 파이거나 굴곡이 생기지 않게 마련이다. 칼이나 낫을 갈 때에는 서둘러 갈면 금방 무디어지게 된다. 필자는 숫돌에 낫을 갈 때 쇠가 닳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인생도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시간이라는 조각이 닮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라인더나 사포로 칼이나 낫을 갈수 있다 보니 결따라 숫돌에 날을 세우는 시골 모습은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결이 고운 숫돌에 칼을 밀수록 날이 더욱 날카롭게 갈린다. 세상일도 칼을 가는 방법과 동일하다.

결이 곱고 그 결대로 사는 사람을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사람이라 일컫는다. 요즘처럼 인심이 흉흉한 시대에 무쇠가 자신을 숫돌에 닳아지듯 우리 정치인도 이런 자세로 살아야만 영원히 기억되는 게 아닐까?

낫을 숫돌에 곱게 문지르듯 원고지 위에 결 따라 살고 싶다. 호미와 낫이 없는 농가에 숫돌조차 없다면 농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까. 낫이나 과도를 가는 방법에 각도가 있다. 부엌칼이나 낫의 각도는 13도, 가위의 각도는 30도, 대팻날의 각도는 40도에 이른다.

이런 정도의 비결이 없는 사람은 제대로 된 농사꾼이 아니다. 이제 숫돌에 낫을 가는 모습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고 있다. 과거 어르신들이 낫을 갈던 그 모습을 회상하면서 목가적인 농촌의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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